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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땅에서의 소요유…見聞이 공부로 이어질 때
낯선 땅에서의 소요유…見聞이 공부로 이어질 때
  • 최재목 영남대 교수
  • 승인 2011.08.29 13: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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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유랑ㆍ상상ㆍ인문학 ① 네덜란드 라이덴에 와서

이번호부터 최재목 영남대 교수(50세ㆍ철학과)의 ‘유랑 ㆍ상상ㆍ인문학’을 1년간 격주마다 연재한다. 이 에세이는 연구년을 맞이해 네덜란드 라이덴대학교에 머물고 있는 최 교수가 유럽 등지를 유랑하며 시인이자 철학자로서, 그리고 화가로서 그곳의 지리·문화·예술(미술품, 건축물)에 접하며 느낀 생각과 발상, 구상을 솔직하고 자유롭게 펼쳐내는 인문 에세이이다. 인문적 의미가 있는 장소·인물·예술품에 대해 딱 100자로만 쓴 시, 그리고 직접 그린 그림, 직접 찍은 사진이 함께 곁들여진다. 

라이덴 시내 풍경.   사진=최재목

 나는 지금 연구년을 네덜란드 라이덴(Leiden)대학에서 보내고 있다. 예전에는 안식년이라 했지만 요즘에는 대부분 연구년이라 한다. 안식만 하지 말고 연구 좀 하라는 뜻으로 새기면 될 듯. 공부하는 사람들은 잘 놀아야 한다. 잘 노는 것, 그게 바로 공부다. 거기서 상상력과 아이디어가 나온다. 아이디어 없이 무슨 논문을 쓰며, 무슨 창의적 기획이 나오랴. 많은 대학들이 연구년 경비를 줄이려 하지만, 난 반대다. 견문을 넓히지 않으면 마음의 여유가 없고, 여유가 없으면 연구력도 줄어든다. 지칠 때까지 놀려주면 지칠 줄 모를 연구력을 보일 것이다. 遊能力이 有能力이다.

11년 만에 맞은 연구년

나는 11년 만에 연구년을 맞았다. 학내의 보직 업무 때문에 중간에 나갈 기회를 놓쳤다. 오랫동안 여러 일들에 골몰하다 심신이 지쳐있었다. 이럴 때 1년간 쉰다는 것, 강의와 잡무 부담 없이 시간을 갖고 자유롭게 생각하며 무언가 구상을 할 수 있다는 것, 다행 아닌가.

 지난 시간 나는 일이 없으면 뭔가 좀 불안했다. 시간을 칼처럼 나누고, 마치 빚진 사람처럼 그 틈바구니로 뛰어다녀야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런 자학의 시간들이 한심스럽기도 했지만, 현실이었다.

지난달인가, 이곳 대학에 근무하는 지명숙 교수가 자신이 번역한 네덜란드 소설가 레온 드 빈터(Leon de Winter)가 쓴『바스티유 광장(La Place de la Bastille)』(문학동네, 2010)을 빌려줘서 읽은 적이 있다. 주인공 나(파올 드 비터)의 내면세계를 관찰하고 분석한 주지적 심리소설이다.

이것을 읽던 중 나는 다음 구절에 눈이 멈췄다. “나는 나 자신의 삶까지도 시대별로 구분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물론 시간이란 것은 구분 불가능한 선이어서 어떤 중요한 시점이든 다림질이라도 한 듯 빳빳하게 펴놓으며 시대 같은 개념 따위에는 아랑곳없이 흘러간다.

라이덴에 도착해서 처음 그린 자화상. 지쳐있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러나 사태를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먼저 시간을 자르고 줄을 긋고 일단락을 지워야 한다. 그렇게 해야 형태가 없는 삶이라는 뭉텅이를 손가락으로 찔러볼 수 있고 또 내 손에 잡히는 더 작은 덩이들을 ‘시대’로 명명할 수도 있다.”(23쪽)

아! 바로 내 삶이 이랬던 게 아닌가. 수첩을 보면 온통 촘촘하게 토막 난 시간들. 까만 글자들, 그건 내 상처와 멍 자국들이었을 터.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였는지, 참 한심했던 자신이 생각난다. 불과 몇 개월 전의 ‘나’ 자신이었다. (오른쪽, 자화상)

여기 와서 나는 놀고 있다. 그러나 결코 놀지 않는다. 어느 때보다 논문도 많이 쓴다. 틈틈 나 자신의 치유를 위해서 시도 쓰고, 그림도 그린다. 책도 읽고, 여행도 하고, 사람도 만난다.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시간을 내 맘대로 설계하며 지낸다. 정말이지 남을 위한 시간이 아닌 나를 위한 시간이다.  

 12년 전의 연구년 때에는 미국의 동부 케임브리지에서 1년을 지냈다. 당시 IMF 직후여서 돈 걱정 때문에 여유 있는 생활을 못했다. 그렇다고 연구만 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연구자로서 내 자신의 위치가 어딘지 낯선 곳에서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볼 수 있는 눈이 생긴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얻었다 자부한다.

라이덴 시내 풍경. 어딜 가나 자전거 도로는 잘 마련돼 있다.    사진= 최재목

네덜란드, 유랑하는 동양학자

 이번에도 처음에는 다시 미국의 서부나 캐나다로 갈까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신에게 유럽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나는 동양학자이지만 동양에만 동양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동양학은 동양에 없고, 동양 저 밖에 있을지도.

 요즘 유럽은 차츰 보수화, 우익화 되고 있다. 많은 나라가 경제적으로 위기다. 그러니 자민족의 살 길을 위해 외래의 타자들을 배척하게 되었다. 다민족, 다문화주의가 위협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유럽에서 배울 게 많다.

 이곳 네덜란드는 잘 사는, 자유의 나라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청바지에 편한 차림으로 다닌다. 검소하고 소박하다. 있어도 있는 체 하지 않고 겸손하다. 대부분 자전거로 다닌다. 어딜 가나 자전거 도로는 잘 마련돼 있다. 

 처음 라이덴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가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참 아담하고 조용하고 깨끗한 도시다. 찰랑이는 운하를 끼고, 예쁘장한 집들이 줄지어선 품격 있는 도시. 그래서 열자×열자=100자로 된 시를 지어보기도 했다.

바다에 맞닿은 땅 홀란드
여름에도 쌀쌀한 바람 뿐
비도 구름도 자유인 나라
운하는 거미줄로 얽혀도
조잘대며 낮고 느린 수평
서로 간섭하지 않는 이웃
케익 같은 벽돌집과 창틀
희고 붉은 삼각 사각의 춤
붙고 붙어 하나의 城같다
파격으로 즐거운 건물들
              「라이덴에서」

 나는 이제부터 네덜란드의 안과 밖으로 유랑하며, 여기서 얻은 인문적 아이디어ㆍ상상에다 사진, 그림, 시를 곁들여 자유롭게 글을 써 나갈 생각이다. 이건 나의 공부고, 수행의 일환이라 생각한다.

최재목 영남대·철학과
일본 츠쿠바대에서 박사를 했다. 동아시아 철학·사상사(양명학)를 전공했다. 저서로 『동아시아의 양명학』『東アジア陽明学の展開』『내 마음의 등불이다: 왕양명의 삶과 사상』『늪 - 글쓰기와 상상력의 유비쿼터스 네트워크』 등이 있다. 현재 네덜란드 라이덴대 IIAS 객원연구원으로 연구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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