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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장'에서 나는 언제쯤 내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학문의 장'에서 나는 언제쯤 내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 유강하 강원대·중문학
  • 승인 2011.08.29 12: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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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_ 유강하 강원대 HK연구교수(중문학)

유강하 강원대 HK연구교수·중문학
원고 청탁을 받고 그간 ‘학문후속세대의 시선’에 실린 글들을 읽어보니, 그때그때의 시대적 문제에서 고민을 풀어나가는 글들이 많았다. 일본의 쓰나미, 신라호텔 한복 금지 사건, 밴쿠버 동계올림픽 등. 아무래도 학문의 영역과 세상살이에 고루 관심을 분배하고 있는 연구자들의 생각이 담겨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 봤다.

그래서 그랬을까.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얼마 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보기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프로 가수들을 대상으로 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으로, 참여 가수들이 더 좋은 노래를 부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무대에서 긴장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프로그램이 끝난 다음 날에는 예외 없이 노래에 대한 다양한 평들과 탈락자에 대한 기사가 뜨곤 했지만, 사실 참여 가수의 탈락 여부는 크게 내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가수들이 노래하
는 모습, 프로답지 않게 긴장하는 모습, 청중들이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었다. 이런 장면들을 보며 나는 신기했고 때로 경이로움을 느끼기도 했다.

현장의 청중들에게, 더 나아가 시청자들에게까지 감동과 경이로움을 느끼게 해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 노래를 이해하려는 노력, 온전한 자기만의 노래로 만들기 위한 숱한 고민, 부단한 연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봤다. 이들을 보면서 나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멍청이가 되고, 생각만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게 된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論語』「爲政」)는 공자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만약 그들이 원곡의 가수들과 똑같아지려고만 했다면 모창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원곡에 대한 고민 없이 자기 창법만을 고집했다면 이도저도 아닌 아류에 머물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방도, 아류도 아닌 온전한 ‘재해석’은 원곡에 대한 충분한 감상, 창조적 비판과 고민, 연습을 통해서만 가능한 경지일 것이다.

가수들의 짧은 인터뷰와 감동적인 무대 공연을 보면서, 이 시대의 학문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에도 수십 권 씩 새로운 책과 논문이 쏟아지는 시대. 읽을 것은 많고 시간은 부족하다는 푸념을 많이 듣고, 나도 많이 한다. 그런데 많이 읽고 보는 것만이 능사일까. 노래를 무작정 많이 한다고 해서 좋은 가수가 된다는 보장이 없는 것처럼, 그저 책을‘많이’읽는 것이 내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준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다.

‘나는 가수다’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가수 박정현이, 또 가수 김범수가 모창이 아니라 원곡을 뛰어넘는 재해석이라는 극찬을 받았던 것처럼, 세상에 편만한 많은 지식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고민과 비판, 통렬한 반성을 거쳐 내 삶 속에 온전히 녹아들었을 때 진정한 앎이 될 수 있고 감동을 줄 수 있다. 그간 학계에서 문제가 됐던 표절, 연구비 오ㆍ남용처럼 비판과 반성 없는 또는 진정성이 결여된 학문의 자세는 마치 모창처럼, 립싱크처럼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고, 실망만 안겨준다.

나는 언제쯤 내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고민에 앞서 지금은 내가 이 길을 걸어오는 동안 때로 내
스승이었고 내 선배였던 그들을 떠올린다. 당신들만의 학문하는 목소리와 창법을 가졌기에 그분들을 ‘가수’라 불러도 될지 모르겠다. 그분들의 진지한, 때로는 매력적인 학문의 노래 덕분에 나 역시‘학문’이라는 지난한 길을 걸어올 수 있었고, 앞으로 계속 걸어갈 그 길 위에서 언젠가는 보다 진지한 내 목소리를, 내 노래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학문의 장’이라는 무대에서 새로운 가수들이 자기만의 목소리를 찾아갈 수 있도록, 자기만의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좋은 노래를 남겨주신 학문의 스승들과 선배들, 더 나아가 비판과 도전, 창의력으로 가득 찬 좋은 무대 마련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 한국연구재단에도 진심어린 감사를 전한다.


유강하 강원대ㆍ중문학
강원대 인문과학연구소 HK연구교수다. 연세대에서 박사를 했다. 중국문화와 신화, 인간 삶의 치유를 연구하고있다. 『도상, 문명의이동을말하다』 등의 저서와 「중국의, 중국에 의한, 중국을 위한 영웅의 귀환」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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