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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관타오, "신해혁명은 혁명 아닌 공화주의의 출현"
진관타오, "신해혁명은 혁명 아닌 공화주의의 출현"
  • 양일모 한림대 · 철학과
  • 승인 2011.08.22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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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차 한국중국학회 국제학술대회 참관기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양쯔강 중류에 위치한 우창에서 청조를 거역하는 포성이 울렸다. 이를 기화로 각 성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청 왕조는 종말을 고했다. 수천여년 동안 지속되어온 중국의 군주정체는 붕괴되었고 1912년는 아시아에서 최초로 공화국, 즉 중화민국이 건설되었다. 그 해의 간지를 따서 신해혁명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신사 계층이 중심이 되었다는 점에서 신사혁명, 만주족 왕조를 배척했다는 측면에서 배만혁명, 민국을 건설했다는 점에서 민국혁명 등 다양하게 불리기도 한다. 민국 기원을 사용하는 타이완과 공산당이 이끌어 온 대륙에서 신해년의 거사는 정치적 평가를 달리 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중국과 타이완에서 신해혁명 100주년을 맞이한 올해는 분위기가 사뭇 예전과는 다르다. 대륙에서는 대대적인 경축행사 준비에 나섰고 톈안먼광장에는 타이완에서 국부로 추앙받는 쑨원의 초상화가 걸렸다. 하나의 중국을 표방하는 중국 정부는 양안 화해를 위해 기념행사의 공동개최를 제의하기도 했다. 중국 관방의 지원 아래 재키 찬(성룡)은 100번째 작품으로 「신해혁명」의 영화 촬영에 들어갔다. 타이완의 국민배우 자오원쉬안이 주인공인 쑨원 역을 맡았다. 관방 민간 할 것 없이 공식 홈페이지에는“신해 정신을 드높이고 중화민족을 진흥하자"는 구호가 보인다. 역사의 정치화를 넘어 정치의 일상화가 성행하고 역사와 전통의 구분이 흐려지는 중국이기도 하다.

신해혁명 100주년과 한국의 중국 연구

지난 18일부터 이틀에 걸쳐 중앙대학교에서 중화민국 교육부와 교수신문사의 후원으로 한국중국학회(회장, 문병도, 광주교대 교수)가 주최한 제31차 중국학 국제학술대회가 개최됐다. 이웃하는 국가의 정치적 열기와는 달리 신해년의 의미를 학술적으로 조망하기 위해 '중국의 전통과 개혁'을 주제로 삼아 어문학, 역사, 철학 세 부문에 걸쳐 변화하는 중국의 역사 속에서 전통과 개혁의 의미를 총체적으로 점검하는 모임이었다.

신문화운동에서 “공자를 타도하자”는 반전통의 구호가 제기되었고, 문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통문화가 반동으로 치부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텐안먼 광장에 공자상이 등장하고 『논어』가 국영방송에서 강의되는 오늘날의 중국의 모습은 중국 밖의 중국연구자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이번 학술대회는 그런 의미에서 눈앞에 나타나는 피상적인 중국이 아니라 중국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 전통과 개혁의 변주곡을 심층적으로 음미할 것을 요청하는 작업이었다.

중국에서 개혁개방 이래 문학, 역사, 철학 등 인문학의 모든 분야에서 기존의 연구를 ‘해체’하는 새로쓰기가 진행되고 있는 만큼, 양일간에 걸친 대부분의 발표는 종래의 연구와는 차별적인 시각을 제시하고자 한 인상을 주었다. 타이완에서는 참가한 소장학자들이 여성사, 언어사, 미술사, 언론사 등 세부적인 영역에서 근대 중국의 이미지를 새롭게 파악하는 연구들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국내 발표자들은 중국에서의 중국 연구의 변모만큼 변신한 흔적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21세기 중국 인문학의 바뀐 모습의 소개, 한중일의 신문기사를 통해 신해혁명의 기억을 동아시아적 차원에서 조명한 연구, 오사운동시기의 반전통주의 속에서 량치차오의 사상적 흔적을 전통과 근대의 역동적 관계에서 파악하는 발표, 홍위병의 홍색테러가 문화대학명의 대중적 기억을 형성해 가는 과정에 대한 분석 등은 새로운 중국 이해에 기여할 수 있는 시각을 제공했다.

특히 이날 기조연설에 등단한 진관타오 타이완국립정치대학 교수「신해혁명과 중국 근대현사의 시기 구분」을 발표, 신해혁명은 혁명이 아니라 신사 계층을 중심으로 하는 공공영역과 공화주의의 출현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중국의 황제제도를 종식시킨 것은 혁명적 사조에서 전화된 혁명적 행동이 아니라 청말 예비입헌 이래로 신사 계층의 권력이 확장되어 온 필연적 결과로 규정했다. 신해년의 기의는 혁명당이 주동했지만, 군주정체의 종식을 성공으로 이끈 기본 동력은 만주를 배척하는 민족주의운동이 아니라 청말 이래의 개혁으로부터 기인한 경제의 근대화와 지방분권운동이었다고 밝혔다. 신해혁명의 혁명설을 부정하는 그는 나아가 타이완 혹은 대륙에서 제시된 중국근현대사의 정통적 시기구분에도 이의를 제기하고, 1840년에서 1894년까지를 ‘근대’, 1895년에서 1915년까지를 ‘현대’, 오사운동 이후를 ‘당대’로 보는 중국근현대사의 3단계설을 제시했다.

이러한 시기구분론을 통해 그는 양무-변법-혁명으로 전개되는 중국의 근현대사연구는 학습 대상이 변화하는 과정만 보여줄 뿐 학습 과정에 참여한 주체의 역할과 그로 인한 학습 내용의 변화 내지 본질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이는 태평천국혁명-의화단운동-신해혁명 등 중국에서 혁명 사조의 고양을 중심으로 역사를 파악하던 혁명사관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기도 하다.

"5 · 4 운동의 계몽적 임무는 진행형"

그는 중국이 기존의 유교적 경세치용의 틀에서 서양을 선택적으로 흡수하는 단계, 서양의 현대적 관념과 제도를 학습하여 민족국가를 건립하는 단계, 학습의 실패와 관념의 재구성하는 단계로 구분하여 이를 각각 ‘근대(pre-modern)’, ‘현대(modern)’, ‘당대(contemporary)’로 파악하고 있다. 유럽이나 일본에서는 근대와 현대가 일치할 수 있지만, 근대와 현대의 구분이 설정이 필요한 것이 곧 중국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1895년부터 약 20년간 중국이 서양을 전면적으로 학습하는 시기를 현대 중국의 기점으로 설정한 그의 견해는 5 · 4 운동이 짊어진 계몽의 임무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그의 주장에서 도드라진다. 앞에 오는 근대가 유교적 경세주의였다면, 당대는 학습한 현대와 전통의 도덕이 융합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전통의 끊임없는 질곡의 환절을 도려내고자 하는 그의 노력은 30여 년 전에 스스로 제기했던 중국사의 ‘초안정구조’라는 거대 담론의 연속으로 보인다. 

진관타오 교수의 대담한 주장은 텐안먼사건에 관여했던 삶의 흔적이 녹아있을 뿐만 아니라 독특한 방법론에 의거한 것이었다. 지난 10여 년 동안 그는 1억2천만 자에 이르는 '중국근현대사상사 전문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고, 이를 토대로 키워드를 중심으로 하는 역사적 의미를 분석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는 이를 '관념사'로 명명하고, 데이터베이스 상에서 키워드를 검색하여 연도별로 사용빈도를 통계 처리하고, 키워드와 관련된 예문들을 추출하여 해당 키워드가 시기별로 사용된 의미의 유형과 변화를 파악하고, 이를 근거로 해당 관념의 의미를 분석하는 작업이라고 설명한다.

진교수의 대담한 주장에서 신해혁명 평가는 국내에서 이미 제시된 견해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학계의 검증을 요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데이터베이스 활용은 수록된 내용의 양과 질에 관한 문제가 제시될 수 있고 통계적 분석 또한 더욱 더 정치한 가공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지만 중국학계뿐만 아니라 우리 학계에서도 인문학의 새로쓰기를 위해서는 경청해야 할 내용이었다. 대륙에서 태어나 청춘을 불사르고 홍콩에서 연구와 사색을 하면서 현재는 타이완에서 활동하는 일종의 유목민적 지식인이 바라보는 중국관이기 때문이다.

타이완의 소장학자들 또한 중국의 주변에서 중국을 바라보는 시선을 견지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번 학술대회는 한국에서 중국을 연구하는 의미를 되새겨보면서 중국을 타자의 시선에서 관조할 수 있는 기회였다.

양일모 한림대·철학과
필자는 도쿄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번역과 개념으로 본 중국의 근대성」등의 논문과, 『관념사란 무엇인가』(역서), 『21세기의 동양철학』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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