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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의 발명을 위한 苦鬪
담론의 발명을 위한 苦鬪
  • 구갑우 서평위원 / 북한대학원대학·정치학
  • 승인 2011.07.05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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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한국 사회과학계 특유의 개념화 가운데 하나가, ‘연도’와‘체제’를 결합하는 방식이다. 53년체제, 87년체제, 97년체제, 2000년 체제 등이 그 사례들이다. 이 개념화의 특징은, 특정 시점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건, 예를 들어 53년의 停戰, 87년의 민주화, 97년의 외환·금융위기,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 등이 일정 기간 한국사회의 행위자들을 제약하는 구조로서 작동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러나‘regime’의 번역어인 이 체제는, 자기재생산을 하는, 한국말로 또 다른 체제인‘system’보다는 낮은 수준의 구조적 강제를 상정하기 위해 사용되는 개념이다.

왜, 특히 이른바 진보적 연구자들은 regime의 번역어인 체제를 선호하는 것일까(김종엽 엮음, 『87년체제론』). 비교정치학에서 정부형태를 지시하거나 또는 국제관계학에서 특정한‘이슈영역’에서 만들어진 규범, 규칙, 기대, 처방, 의사결정절차 등으로 정의되는 체제가 왜 한국에서는 특정한 이슈영역이 아닌 사회의 총체적 구조를 규정하는 개념적 변용을 거치고 있는 것일까. 이 체제는 마음의 영역으로 확장되기도 한다(김홍종, 『마음의 사회학』). 다른 사회에서 숫자로 기억되는 또는 숫자로 구조화하는 체제는, 일본의 55년체제나 아마 9·11 정도일지 싶다. 체제의 모국들에서는 숫자보다는 공간이 또는 이슈가 체제 앞에 붙는 단어들이다.

왜, 사건이 체화돼 있지 않다면 그 의미를 찾기 어려운‘숫자 + 체제’가 한국적 개념으로 사용되는 것일까. 날짜를 선호하는‘마음체제’에 대한 연구가 필요할 수도 있겠다. 몇 가지 추론 정도는 가능하다. 첫째, 숫자라는 기표가 가지는 모호성이 개념의 탄력성을 높일 수 있다. 개념의 정치에서, 모호성이 포괄성을 획득한다면 헤게모니를 행사할 수도 있다. 숫자로 표현되는 개념이 제공하는 프레임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한국적 달력 정치의 반복 속에서 우리는 숫자들의 재해석을 보곤 한다. 2000년대에 발명된 87년체제는 그 대표적 사례 가운데 하나다.

둘째, 한국사회의 역동성이, 즉 중대국면을 양산해 왔던 한국의 역사가 숫자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건이 구조화의 계기인가를 둘러싸고 연구자들이 의견일치를 보이고 있지는 않다. 지금-여기 한국의 사회성격이 87년체제인가 아니면 97년체제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전개되기도 했다. 한국사회의 주요 모순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여러 시각들이 공존하고 있다. 87년체제론이 진보개혁세력을 호명한다면, 97년체제론은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구성하고자 한다. 다른 한편, 한반도라는 시각이 체제 앞의 숫자를 결정하게끔 하기도 한다. 53년체제와 2000년체제가 그 사례들이다. 87년체제론이 민주화를 토대로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가능했다는 논리를 전개하면서 2000년 체제론과 결합하지만, 97년체제론에는 한반도적 시각이 결여돼 있다. 이 지점이 두 체제론의 결정적 차이기도 하다.

이제 체제론은 과거와 현재 한국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을 넘어서 가고 있다. ‘2013년체제론’은 미래를 설계하려 한다(백낙청, 「‘2013년체제’를 준비하자」). 한국형 정치경제모델의 새로운 형태라 할 수 있는 시민·평화·복지국가가 2013년체제의 핵심 구성요소다. 그리고 그 국가들의 관계도 설정된다. 평화가 복지의 재정적 기초를 제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평화가 없다면 복지의 확대를 위한“정치적 동력이 생기기 어렵다는”문제의식이 바로 그것이다. 복지를 위해서도 평화가 필요하다는 발상은, 분단 체제 극복의 한 길인 평화체제 구축이 한반도를 아우르는 2013년 체제의 구축과 맞닿아 있다. 큰 願에 대한 구상이 선거주기에 맞춰 체제를 붙이는 정치공학의 한계를 넘어서게 한다.

그러나 숫자+체제의 개념이 가지는 근본적 한계가 있다. 개념의 모호성과 복합성이 다양한 주체를 하나로 묶는데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적극적 정의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 연대의 끈이 약할 수밖에 없다. 비판의 무기를 넘어 무기의 비판의 매개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고 선거공학이란 혐의를 벗기 위해서는 숫자+체제의 개념보다 다양한 세력이 지향하는 바를 아우를 수 있는 개념화가 필요하다. 연대와 연합은 그 과정이어야 한다.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격동의 해인 2012년을 준비하며,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국제적 변화가 가져올 수도 있는 압력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따라서 국제적 차원의 원도 담을 수 있는, 담론의 발명을 위한 苦鬪가 시작되고 있다.

구갑우 서평위원 / 북한대학원대학·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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