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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쉬가 찍은 화가들과 그들의 작품
카쉬가 찍은 화가들과 그들의 작품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1.05.09 14: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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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미소 또는 초현실주의 세계

샤갈, 손가락이 7개인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26×107cm, 1913~1914,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
파블로 피카소(1881~1973)를 만나기 위해 그의 저택을 방문했을 때 카쉬는 "사실 악몽과도 같았다"고 고백했다. 떠들썩한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캔버스가 가득한 넓은 방들을 누비고 다니던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의 집에서는 촬영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한 카쉬는 도자기 미술관에서 나중에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당시 200파운드가 넘는 장비를 갖추고 미술관에 도착한 카쉬를 본 미술관 관계자들은 "피카소는 절대 오지 않을 겁니다"라며 입을 모았다. 하지만 그는 약속을 지켰다. 뿐만 아니라 새로 산 셔츠까지 입고 정확한 시간에 나타나 모두를 놀라게 했다. 카메라 렌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알아서 구도를 잡아주는 피카소의 모습은 젠틀하기까지 했다.

피카소는 당시 사진 작가들에게 가장 인기 높은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카쉬는 독특하게 그에게 어울리는 소품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고민 끝에, 평소 늘 여성이 함께 했던 피카소의 인생처럼 여체가 그려진 도자기 작품을 이용해서 상측 정면광을 이용해 강하게 표현했고, 그 결과 피카소의 예술과 인생역정이 사진 속에 녹아날 수 있었다.

카쉬가 프랑스 출신 화가 샤갈(1887~1985)을 만났을 때, 샤갈의 나이는 이미 80세를 바라보고 있었고, 전성기를 지난 시점이었다. 카쉬는 활영 당시 샤갈에게 그림 속 등장인물처럼 편안한 자세의 자연스러운 포즈를 요청했다. 자신의 작품을 배경으로 이웃집 편한 할아버지처럼 포즈를 취한 샤갈은 그의 그림 속 이야기처럼 행복해 보였다. 환상과 신비가 융합된 독자적 개성을 표현한 그는 주로 소박한 동화의 세계나 고향의 생활, 하늘을 나는 연인들이란 주제를 즐겨 다뤘다. 자유로운 공상과 풍부한 색채로 유명했던 그의 대표작품은 「손가락이 7개인 자화상」,「바이올린 연주자」,「기도하고 있는 유대인」,「에펠탑 앞의 신랑과 신부」, 「서커스」등이다.

Marc Chagallⓒ 1965 Yousuf Karsh

미국의 사진작가이자 화가였던 맨 레이(1890~1976)는 1924년경부터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가했다. 초현실주의를 접하기 시작하면서 사진에 의한 빛의 조형에 흥미를 가지게 된 맨 레이는 렌즈를 사용하지 않고 인화지에다 직접 피사체를 배치하고, 피사체에 빛을 비춰 나타나는 추상적 영상인 레이요그래프(rayograph) 기법을 창안했다. 카쉬와 맨 레이는 파리에 위치한 맨 레이의 스튜디오에서 처음 만났다. 맨 레니는 '살아 있는 전설'이라는 거창한 칭호를 가볍게 웃어넘겼던 대인배였다. 그런 맨 레이를 카쉬는 '독창적인 예술가이자 사랑스러운 인간'이라고 표현했다. 촬영하는 동안, 맨 레이는 "나한텐 문제란 없어요. 해결만 있을 뿐이죠"라며, 수없이 많은 것을 창조하고 개척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호안 미로(1893-1983)는 꿈을 그려낸 초현실주의 화가로 알려져 있다. 초현실주의 특유의 어두운 느낌은 배제하고 화려한 색깔들로 내면의 판타지를 그려냈던 그는 카쉬와의 첫만남에서 휴일에 은행가들이나 입을 법한 옷을 입고, 소극적이고 조요한 표정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밝고 생동감 있는 호안 미로의 작품 세계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카쉬는 "호안 미로에게 작업복을 입히자 그의 아이 같은 재치와 유머러스함이 사진에 나타났다"고 활영 당시를 회고했다. 호안 미로가 가진 특유의 예술성을 이끌어내는 매개로 작업복을 선택한 카쉬. 이는 카쉬가 인물을 잘 해석하고 그 특징을 고스란히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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