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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시봉' 또는 전자책
'세시봉' 또는 전자책
  • 이택광 서평위원 / 경희대
  • 승인 2011.04.12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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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웬만한 논문들은 앉은 자리에서 인터넷을 통해 받아볼 수 있기 때문에 과거처럼 현지 도서관을 방문해서 하루 종일 복사기 앞에 매달려 있는 시간을 줄일 수 있어서 편리해졌다.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과거에 전공이 서양 쪽일 경우는 자료수집이라는 명목으로 ‘현지조사’를 다녀와야 하는 것이 관행처럼 되다시피 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 말이다.

그런데 편리성이 보장된 만큼 그렇게 받아놓은 논문 파일을 읽고 관리하는 것이 또 골칫거리로 부상했다. 컴퓨터 모니터로 논문을 몇 시간 씩 읽는다는 것이 고역에 가까운 일인지라 아예 종이에 인쇄를 해서 읽는다는 이들도 있지만, 그 많은 논문들을 일일이 하드카피로 만들어서 정리한다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다. 그래서 내 경우는 아예 논문 파일을 읽을 수 있는 전자책 리더기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전자잉크를 사용한다는 전자책 리더기는 종이책과 유사한 인터페이스로 각광을 받으면서 새로운 독서유행을 주도할 정도로 인기가 높은데, 막상 써보니 장단점이 있긴 하지만, 없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무엇보다도 출퇴근이나 여행 시에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기에 그만이었다. 여러 권의 책을 가방에 쑤셔 넣고 낑낑거리면서 들고 다니다가 후회도 여러 번 했던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단행본 수천 권을 저장하고도 전혀 무게를 느낄 수 없는 가뿐한 전자책 리더기가 더할 나위 없는 문명의 이기인 셈이다. 

필요한 논문도 여러 편 한꺼번에 넣어 놓고 이것저것 불러내서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비좁은 공간에서 페이지를 요리 조리 넘겨야하는 번거로움도 덜 수 있어서 좋았다. 게다가 컴퓨터 모니터에서 문자를 읽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종이책에 가까운 느낌을 주기 때문에 책에 대해 ‘고전적인 관점’을 고수하는 나 같은 사람도 거부감 없이 이용할 수가 있었다. 마치 과거에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사용해서 찍어낸 성서를 선전하면서 “손 글씨와 거의 동일하다”고 말했던 것처럼 전자책 리더기도 종이책과 거의 동일한 독서경험을 제공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독자들 사이를 파고들고 있는 것이다.

문체반정을 주도했던 정조는 글의 가벼움뿐만 아니라 책이라는 물질적 매체의 가벼움도 규제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때 내세운 이유가 가벼운 책은 누워서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독서의 엄숙함을 침해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독서관’을 고집한다면, 전자책 리더기 같은 것으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독서 자체에 대한 모독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좋든 싫든 전자책의 시대는 코앞에 다가왔고, 과거의 독서가들도 조금씩 바뀐 현실에 적응해야할 필요가 대두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처럼 새로운 독서매체로 주목을 받는 전자책 리더기를 보고 있으면, 기원적인 책의 형태를 떠올리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처럼 펄프로 만든 종이로 책을 찍어내기 시작한 것은 장구한 역사에 아주 최근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전자책 리더기의 모양새가 원시적인 책의 형태인 서판을 닮아 있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처럼 보이지 않는다. 기술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기보다, 과거의 것을 오늘의 세계로 다시 불러들여서 종합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전자책도 이런 방식으로 온고지신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면, 전자책 리더기로 책을 읽는 사람을 일컬어 ‘얼리어댑터’라고 부르면서 무슨 도깨비 요술에 넋을 놓은 사람처럼 간주할 이유는 없다는 생각이다.

전자책의 도래는 출판형태와 독서방식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 변화를 근본적인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종이에 활자를 인쇄해서 제책하는 방식이 책이라는 보통명사를 규정하는 필수조건으로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당분간 종이책의 지위는 상징성을 유지하겠지만, ‘서재’라는 다분히 귀족주의적 노스탤지어를 함축하고 있는 공간은 책을 읽고 보관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로 자리 잡을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을 좋다거나 나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책 형태의 변화는 선악의 저편에서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십대 아이돌 그룹들의 노래에 신물이 난 사람들이 세시봉을 옹호하면서 과거의 노래나 가수가 예술성이나 가창력 면에서 훨씬 훌륭한 것처럼 쉽게 말하지만, 당시에 활동했던 대중가수들에 대한 세간의 태도들을 환기해본다면, 당시에 그들 또한 비슷한 편견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말하자면, 언제나 과거에 대한 신비화는 현재에 대한 불만을 보상하기 위한 ‘원시화’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렇게 때 묻지 않고 순수했던 기원적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전자책이냐 종이책이냐 양자택일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둘 다를 모두 포용할 수 있는 유연한 태도야말로 변화하는 문화적 상황에 개입할 수 있는 계기들을 제공해주지 않을까.

이택광 서평위원 / 경희대 영미문화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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