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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에 핀 옥시덴탈리즘과 문화적 다원주의
동시대에 핀 옥시덴탈리즘과 문화적 다원주의
  • 이병수 건국대 HK교수
  • 승인 2011.04.05 1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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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박물관 기획전 '우리 학문의 길'에서 만나는 박종홍과 함석헌

인문학박물관의 세 번째 기획전이 눈길을 쏙 끈다. 오는 9일부터 8월 31일까지 서울 종로구 계동 중앙고등학교 내 인문박물관에서 열리는 '우리 학문의 길'이다. 쉽게 말해 도서관 구석에 묻혀가는 '자료'로 '우리 학문'의 발자취를 더듬겠다는 기획이다. 학문의 과제, 학문의 소산, 학문의 목표로 크게 나눠서 역사, 철학, 정치, 사회, 경제, 법, 교육, 심리, 민속, 문학, 미학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살필 계획이다.

인문학박물관측의 설명에 따르면 이번 전시는 박물관 상설전시 내용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우리 학문의 의식내용별 전개를 별도로 살펴보는 일의 필요에서 출발했다. 눈여겨 볼 대목은 제도권 대학의 인문학 연구와의 차별성을 모색한 부분이다. 대학 안의 인문학 연구가 학문내적 논리 전개의 역사를 보여준다면, 이들 박물관 전시에서는 "우리 학문이 걸어온 정신의 길을 전시하는데 의의가 있다는 점"을 내세운다.

이와 관련 '우리 학문의 길' 기획전시에 발맞춘 도록집에 게재될 이병수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HK교수의 글 「1950-1970년대 우리 학문 길: 박종홍과 함석헌을 중심으로」을 발췌해본다. 그가 '우리 학문'을 규정하고, 거기에 적합한 보편적 사상태로서 박종홍과 함석헌을 비교 제시한 까닭이다.

                                    
 학문의 보편성을 염두에 둔다면, 보편성을 제한하는 듯이 여겨지는 ‘우리 학문’이란 말에 저항감을 가질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굳이 ‘우리 학문’을 말하는 연유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이는 학문 자체의 관심과 지향성이 우리의 역사와 사회에 터 잡지 못하고 외부 환경의 변화에 따라 휘둘려 온 학문역사와 관련이 깊다. 식민지 시기 일본 지향적이었던 학문이 해방 후 미국 지향으로 변모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우리의 학문은 내적 성찰 없이 외부세계의 변화를 추수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학문’이라는 말은 외부세계의 변화와 영향에 따라 학문적 관심과 경향의 교체가 이루어진 수입학문적 상황에 대한 반성의 산물로 등장했다.

 다음으로 ‘우리 학문’을 말하는 연유는 모든 사상이나 이론들이 한결같이 그 발생과 문제의식 그리고 언어 등 자국의 문화적인 배경을 암묵적으로 지닌다는 점과 관련된다. 보편적 진리를 지향하는 철학이라 하더라도 영미철학, 독일철학 등의 특색을 말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인문사회과학은 특정한 역사적, 문화적 제약을 받으면서도, 아니 그에 기초하여 모든 사람에게 공명되는 보편적 의미를 지향한다. 학문적 보편성이란 기성의 어떤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삶의 문맥에서 출발하는 힘겨운 분투적 노력에 의해 타인의 공감을 확보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 학문’은 ‘그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우리끼리의 학문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과 전통에 기초해 우리에게 절실한 문제를 다룸으로써 ‘그들’에게도 통하는 보편적 사유의 지평을 열자는 의미를 지닌다.

 

박종홍
1900년대에 태어나 20세기를 꽉 채우며 살다 간 박종홍과 함석헌이 동서문명의 회통을 모색한 것은 20세기 한국 정신사에 고유한 동서양 정신의 만남과 갈등이라는 사상사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동서양의 사상을 넘나들면서 고민한 이들의 진지한 사유 흔적은 전통 학문과 서구 학문의 생산적 종합, 곧 ‘우리 학문’의 길을 개척한 대표적인 사례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동서문명의 만남과 회통에 대한 이들의 경험과 사유는 서로 달랐다. 한 사람은 제도권 학계에 몸담으며 국가권력이 주도하는 민족중흥에 열광했으며, 다른 사람은 재야의 투쟁현장에서 고난 받는 민중의 해방을 염원했다.

박종홍과 함석헌은 20세기 동서문명이 교차하는 한반도에서 동서양 사상의 회통을 모색하였고 각자의 창조적인 사상을 내놓았다. 그들의 사상이 형성된 시기는 우리 역사에서 독재가 일상화되고 냉전논리가 기승을 부리던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였다. 그러나 동일한 시대를 살다간 두 사람의 삶과 사상은 너무도 이질적이었다. 평양고보 선후배 관계인 두 사람 모두에게 3·1운동은 민족 현실에 눈 뜨게 만든 결정적 계기였으나, 3·1운동 이후 평양고보에 복교한 박종홍과 자퇴한 함석헌의 행로가 상징하듯 이후의 삶과 사상은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다. 박종홍은 약관의 나이에 <개벽>지에 기고한「조선 미술의 사적 고찰」에서 우리의 불교미술이 인도의 간다라 문화와 중국문화 등 여러 요소가 종합적으로 어우러진 ‘동양미술의 결정’이라며 우수한 민족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피력했다. 반면 함석헌은 『성서적 관점에서 본 조선역사』에서 찬란한 우리 문화가 아니라 고난으로 점철된 부끄러운 역사에 주목하면서 민족 고난의 역사를 십자가 고난의 관점에서 재해석했다. ‘영광된 역사’와 ‘고난의 역사’라는 두 사람의 민족사 이해방식에 이미 ‘민족중흥’과 ‘씨알사상’의 맹아가 드러나 있음을 알 수 있다.

 

함석헌
박종홍과 함석헌이 전통사상을 해석하는 관심의 지평과 관점을 간단히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박종홍이 민족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 국가주의적 지평에서 전통(유학)을 해석했다면, 함석헌은 국가주의야말로 씨알이 겪는 고난의 원천이라고 보고, 씨알의 자발적이고 자연스런 생명의 힘을 신뢰하는 씨알사상적 지평에서 전통(노장사상)을 해석했다. 그 사상적 귀결이 바로 국가주의적으로 해석된 유학의 천명사상과 씨알의 자치정신으로 해석된 노장사상이다. 박종홍의 사상은 박정권의 정치권력을 매개로 공식적인 국가교육으로 실현됐고, 다양한 의견을 국론분열로 매도하고, 억압적 감시체제의 제도화를 총화단결 정신의 구현으로 정당화하는 실천적 기능을 했다. 반면 함석헌의 사상은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서 씨알의 자치를 중시하고, 박정권의 탄압 속에서 억압받는 씨알들의 해방을 위한 실천적 기능을 했다.

둘째, 전통사상을 해석하는 관점에서 볼 때, 박종홍은 과도한 민족주의적 열정으로 한민족의 전통사상을 특권적으로 이상화하는 편협한 옥시덴탈리즘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면, 함석헌은 각기 다른 민족과 문화에는 고유한 입장과 견해가 있기에 아무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다고 믿는 종교적, 사상적, 문화적 다원주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유학적 세계관을 신봉한 박종홍에게 헤겔철학이나 하이데거 철학은 유학의 천명사상을 정당화하기 위한 서양철학적 계기에 불과하지만, 기독교인인 함석헌에게 노장사상은 진리를 드러내는 또 다른 사상적 원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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