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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플소프의 '포르노성 이미지'르 옹호하는 이유
메이플소프의 '포르노성 이미지'르 옹호하는 이유
  • 박대정 프리랜서 큐레이터
  • 승인 2011.03.27 23: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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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데이브 히키 지음, 『보이지 않는 용』(박대정 옮김, 마음산책, 2011.2)

 

오늘날 미술비평이 어떤 위협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생각은 터무니없이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간주된다. 한국에서 미술비평이 주로 학계의 강단비평이나 미술가의 전시홍보용으로 유통되는 현실을 감안하면 새삼스런 사실도 아닐 것이다. 이것이 물질세계에서 미술을 경험하는 우리 삶에 미술비평이 그렇게 불충분하고 무력한 이유이자, 미술이 그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비평과 무관한 불특정 다수에게도 항상 열려 있어야 하는 이유다.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미국의 문화평론가 데이브 히키의 이 책은 아름다움과 민주주의 관계에 대한 성찰을 통해 미술의 효용을 논한 평론집이다. 초판은 1993년 진보와 보수진영이 격하게 대치했던 문화전쟁 시기에 나와 학계에 적잖은 물의를 일으켰고, 그로부터 16년 뒤인 2009년에 서문과 제5장 ‘아메리칸 뷰티’가 추가된 개정증보판이 시카고대학교출판부에서 나왔다. 이 책은 개정증보판을 완역한 것이다. 

히키의 주장은 본질적으로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에 달린 것이요, 미술품은 보는 즐거움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미술품의 가치를 판단할 때 그것의 외양보다 그 안에 담긴 ‘의미’를 기준으로 삼을 경우 대중을 가르치고 이끌려는 기성 제도의 노예가 되고 만다. 즉 미술의 힘은 구경꾼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얘기다. 일견 새로울 것이 없는 이 악의 없는 주장으로 히키는 미술품의 의미에 천착하는 학계로부터는 ‘이단아’로, 형식주의와 후기 구조주의 비평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술비평을 갈망하는 대중독자들로부터는 ‘자이언트’로 불리게 되었다. 이른바 문제적 평론집이 된 이 책에서 히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크게 다음과 같다.

먼저 히키는 이 책 전체를 통해 아름다움 없이 대중의 주체적 삶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정의 내릴 수 없으며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구경꾼의 감탄을 자아내는 저녁노을에서 신인선수의 점프 슛, 광고와 패션, 그리고 미술품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움은 지식의 세례를 받아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인간의 삶 전체와 관계를 맺는 광범위한 가치이기에 지지집단에 의해 언제나 논의되고, 재발견되고, 다시 만들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었던 그리스 최고의 절색 헬레네, 베르니니가 조각한 테레사 수녀의 무아지경은 물론이고 대중문화의 아이콘인 워홀의 실크스크린까지 아름다움의 언어는 기독교 시대 이전 지중해 연안의 제반 사회로부터 물려받은 찬란한 다신교 유산의 일부임을 말한다.

아름다움은 그 자체가 목적(형식주의)이 아니라, 기존의 통념에 저항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수단으로 쓰일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미술이 대표적이다. 이 책의 제2장에 나오는 카라바조의 「성 토마스의 불신」(1601)과 메이플소프의 「헬무트와 브룩스, N.Y.C.」「루, N.Y.C.」(1978)처럼 미술에는 엄숙한 종교 교리에서부터 파격적인 성행위까지 거의 무엇이든 담을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의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전복적이다. 여기서 히키가 강조하는 바가 아름다움의 언어, 곧 민주주의다.

히키에 따르면 미술에서의 민주주의는 아름다움이냐 추함이냐, 즐거움이냐 고통이냐, 예술이냐 외설이냐 식의 양자택일의 자유와 혼동돼서는 안 된다. 또한 미술전문가가 논쟁적인 이미지를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 하에 ‘예술작품‘으로 몰아가는 행위와도 혼동돼서는 안 된다. 히키는 메이플소프의 포르노성 이미지의 아름다움이 속세의 구경꾼들을 참여시켜 발언권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현대미술을 에워싸고 있는 고급화와 신비화, 도덕적 고립의 분위기를 극복하고 ‘주변성’을 알린다는 점에서 열렬히 옹호한다. 동시에 그 사진을 외설로 규정하고 미국 국립예술기금의 예산을 대폭 삭감시킨 공화당 제시 헬름즈 상원의원의 행동 역시 칭찬한다. 메이플소프에게 포르노성 사진을 제작할 자유가 있듯이, 헬름스에게도 자신의 신념에 위배되는 사진에 반대할 자유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미술은 이러한 논쟁 속에서만이 기성 가치와 통념에 저항할 수 있고, 훌륭한 정치의 영역으로 대중에게 인식될 수 있다. 미술의 힘이 이러할진대, 미술 감상이 유익하다는 이유로 보란 듯이 우리와 이미지 사이를 가로막고 계도하려는 미술관(비영리 대안공간도 포함된다)·대학교·재단·출판업체들을 뭉뚱그려 히키는 ‘치료기관’으로 부른다. 그가 보기에 뉴욕 현대미술관의 초대 관장 알프레드 바와 나치 독일의 문화선전부 장관 괴벨스는 치료기관의 대표적인 마취 전문가들이다.

히키가 아주 예리하게 본 것이 바로 치료기관의 정체를 벗겨 낸 부분이다. 미국 미술계는 전후 호황을 누리면서 뉴욕의 사설 갤러리들로 이루어진 소규모 네트워크에서 미술 관련 박사와 석사들로 구성된 거대한 행정기관으로 팽창했다. 그리고 공공자금으로 운용되는 탈근대주의적 대안공간의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 치료기관들이 획일적인 연동 후원 체제를 운영하면서 권력과 비과세 자금을 획득하기 위해 인정사정없는 경쟁을 벌여 왔음에도 미술평론가들은 ‘시장의 타락’에 불평하는 것으로 자족하는가 하면, 구경꾼의 시각적 즐거움과 상관없는 비영리 기관들이 내놓는 특정 작품들에 대해서는 문화적 자선의 한 형태라는 경솔한 판단을 내린다고 히키는 비판한다.

미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치료기관의 이러한 모습은 최근 한국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미술전문가들은 여전히 아름다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 미술의 논쟁적 힘을 마취하여 미술관용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성급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아름다운 미술품이 팔리면 곧바로 특권층의 우상숭배적인 상품이라며 낙인을 찍고, 잘 나가는 좌파 비평가들은 엘리트주의적 압제의 표상이라며 미술품의 외양이 주는 시각적 즐거움을 하찮게 취급한다. 이 모든 해석들이 미술을 경험하는 우리 삶에 아무런 떨림도, 쓸모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해석의 자유를 빙자한 해석의 폭정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이 히키의 생각이다.

이 책은 서양 미술에서 아름다움의 역사를 되풀이하거나 아름다움의 본질에 대한 경쟁적인 이론들을 비교하지 않는다. 대신에 호메로스가 헬레네의 절색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그것이 시민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묘사했듯이, 히키는 르네상스부터 오늘날까지 아름다움이 대중에게, 미술가에게, 비평가에게, 정치권력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러 각도에서 접근해감으로써 그것이 입체적으로 조명되길 바란다. 아름다움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독보적으로 평가받는 히키의 비평은 유행의 최전선에 놓인 갖가지 이론과 담론이 난무하는 한국 미술비평의 양적 팽창과 질적 답보라는 위기의식에 유용한 키잡이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박대정 프리랜서 큐레이터
필자는 이화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란미술관과 하이트-진로그룹 큐레이터를 지냈고,  ‘여성공공미술 프로젝트 마더시티서울’ 등 여러 전시를 큐레이팅했다. 현재 경원대에서 미술이론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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