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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학자들 '시대적 불가피론' 우려"
"진보 학자들 '시대적 불가피론' 우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1.03.27 22: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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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젊은 연구자의 박정희 체제 비판

“박정희 시대 지배체제의 통치전략이 상정하고 있던 이상적 인간형과 당대 추진된 여러 근대화 기획들, 개발 프로그램들의 성공 여부 및 그 정도가 맺고 있던 내적 관계를 감안한다면, 오늘날 진보적 지식인들이 박정희 시대를 규범적으로 긍정하는 경향은 대단히 우려스러운 것으로서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8일 경남대 인문과학연구소(소장 김재현, 철학)가 마련한 ‘박정희 시기, 지식인 담론 그리고 민족 내러티브’ 학술대회에서 제기된 소장 연구자의 비판이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김보현 성공회대 연구교수(정치학)다. 그는 「박정희정부 집권기 지배체제의 통치전략 ‘자조하는 국민 만들기’」에서 진보적 학자들이자 학문적 동료인 선배들에게 이 같은 쓴 소리를 던졌다.

그에 의하면, 그것은 보수적 논자들이 전파한 ‘시대적 불가피론’의 긍정으로 이어진다. “공통된 인식 지평들 안에서 애초에는 ‘박정희시대’를 ‘저발전’, ‘발전 없는 허구적 성장’, ‘전근대’ 혹은 ‘半봉건’, ‘매판경제의 파탄’, ‘종속의 심화’ 등으로 파악하더니, 나중에야 ‘눈부신 발전’과 ‘국민경제의 자립’, ‘합리화의 진전’ 등이 바로 ‘박정희시대’의 직간접적 소산들이란 점을 깨달은 것이다.” 그의 눈에는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장하준 캠브리지대 교수도 이런 경향에 더욱 힘을 실어주는 것으로 들어온다. “공교롭게도 국가주의적 금융·산업정책체제에 토대를 둔 민족주의적 경제발전전략의 옹호가 장하준의 핵심 논점이다.”

김보현의 논의가 시작하는 곳은 근대화의 발전 조건들이었던 사회적 고통과 희생들, 근대화와 그 발전의 와중에 구정된 특수한 주체-삶의 양식과 내용이다. “박정희시대의 문제적 측면은 근대화와 발전이 기정사실들이라 하여 도외시될 수 있는 그 과정들 외부의 무엇이 아니라, 근대화와 발전이란 명백한 사실들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의 시선은 특수한 주체-삶의 양식과 내용을 투시한다.

그가 제시한 논리는 명쾌하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개발은 우리를 가난으로부터 해방시켜 준 은혜로운 기획이 아니라, 가난을 일정 수준으로 억지하되 구조화·재생산하면서 관리하는 지배의 안정화·지속화 프로젝트로 볼 수 있다.”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가난을 구조화·재생산하면서 관리’하는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그가 주목한 부분은 ‘새마을운동’과 민족중흥론과 조국근대화론, 그리고 자조론이다. 물론 이들은 ‘민족 내러티브’로 수렴되는 것들이기도 하다. 이 대목에서 김보현은 박정희시대의 지배체제가 구사한 통치전략(‘강압’, ‘제재’, ‘공포’)에 ‘자조(self-help)하는 국민 만들기’라는 항목을 첨가한다.

새마을운동 점화기에 박정희는 “우리 스스로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써 개척해나가는 강인한 자조정신과 자주·자립의 정신을 가지자”라는 유명한 발화를 남겼다. 김보현에 따르면, 이것은 평범한 농촌 주민들이 일상생활 속에 사고하고 행동하는 습관을 겨냥한, 정신-품행 개조의 논리였다. 이 지배체제의 자조론은 “농민들의 전체적 생활상을 오래된 가난과 이 가난을 낳은 고질적 나태, 의타심, 무기력, 체념 등으로 재현하면서, 농민 하나하나의 가슴 속에 ‘반성하는 마음’(일종의 ‘죄의식’을 포함한)을 불어넣는” 동시에 “사회-정치적 관계들의 응집물이라 할 국가정책, 사회경제제도 등이 지닌 효과들은 문제적인 상황에 대한 진단과 처방의 지평들 모두에서 지워버리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박정희시대 지배체제가 구사한 ‘자조론’은 역설적이게 외부의 도움을 전제한 것이었다. 하나는 위로부터 행해진 ‘指導’이며, 다른 하나는 정부의 ‘물질적 지원’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농민들을 개별화해 ‘자조’하는 마을들끼리 경쟁하도록 하고, 경쟁하는 주체들 가운데 심사-선별해 ‘우수한’ 마을을 지원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바로 이점 때문에 김보현은 “새마을운동은 빠른 공업화 과정에서 근대 국가가 혹은 거대한 사회주체들이나 할 수 있는 혹은 해야하는 사회간접자본 건설사업들을, 아주 저렴한, 무상에 가까운 노동력의 동원을 통해 해결하는 과정이기도 했다”고 단언하게 된다. 

2006년을 지나면서 학계에서는 박정희 시대를 좀 더 치밀하게 분석하는 작업들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진보 학계에서도 ‘사실’로서의 박정희 시대를 인정하는 시각이 제출됐다. 대표적 논자가 바로 이병천 강원대 교수(경제학),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사회학)이다. 2007년 『다시 대한민국을 묻는다』(한울)를 공동 출간하면서 이병천 교수는 “역사적 현상의 양면성을 돌아보지 않으면 그 현상이 갖는 역사적 의미의 총체성을 포착할 수 없다”고 주장해 화제가 됐다. 이 교수의 메시지는 ‘산업화의 성과를 인정하자’는 것이었다. 근대국가 성립과 독재체제의 모순을 별개로 논의하자는 논리였다. 조희연 교수 역시 같은 해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역사비평사)를 내놓으면서 진보-보수 도식에 입각해 박정희 체제를 일면적으로 이해해왔던 기존 시각을 흔들어놓았다. 다양한 얼굴을 동시에 가진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메커니즘으로 구성돼 있다는 지적이었다. 

이번 학술대회에서 논의를 충분히 개진하진 못했지만 김보현은 “중요한 것은 근대화와 발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 기도되거나 실현된 삶”을 강조하면서 논의를 다시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그의 논의가 ‘박정희 유산’을 계승한 현실 정치권력이 귀환하고 있는 현실에서 어떤 논쟁점을 그려낼지 두고 볼 일이다.

한편 이번 학술대회는 그간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았던 박정희 시기의 지식인 담론 문제 특히 ‘한국’, ‘한국적인 것’이 어떻게 민족 내러티브로서 탄생, 재구성됐는가를 천착했다. 노지승 경남대 교수(인문학부)가 「1960년 한국근대문학사 서술의 정치적 무의식」을, 국사편찬위원회 이상록 연구사가 「1960~70년대 지식인 담론에서 한국적인 것의 구축」을, 이현석 아주대 교수가 「1970년대 창비 리얼리즘 논의에 나타난 공간의 이념성」을 발표했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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