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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사] 신뢰가 사람을 변화시킨다
[신년사] 신뢰가 사람을 변화시킨다
  • 이영수 교수신문 발행인/경기대 명예교수
  • 승인 2011.01.03 11: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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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辛卯年의 첫날이 밝았습니다. 어김없는 자연의 순환이지만, 세상사는 그리 단순하지 않더군요. 그래서인지 “시작이라는 말 처음이라는 말/참 생생하지요”라고 노래한 천양희 시인의 「시작과 끝」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시인은 “끝이라는 말 마지막이라는 말/참 멸멸하지요”라고 처음과 끝의 공간을 비워내고 있습니다. 시인이 시간의 거리를 소멸한 이유는 “가는 해 가는 날이/또 얼마나 얼룩얼룩”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돌아보면 지난 한 해는 참 아픔이 많은 시간들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안타까운 희생이 벽두부터 들려왔었지요. 천안함의 젊디젊은 병사를 잃은 어머니들의 눈물이 가슴을 때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아픔은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자문하게 만듭니다. ‘가는 해 가는 날이/얼룩얼룩’ 하다고 노래한 시인의 혜안도 이런 아픔을 예측한듯 합니다.

지난 한 해 우리 사회 특히 교육 부문에서도 아픔과 좌절이 교차하는 목소리가 많았습니다. 학교 현장에서 발생한 많은 사건들 가운데는 얼룩진 醜聞도 적지 않았지요. 교사가 학생을, 학생이 교사를 믿고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대학에서도 사정은 같았습니다. ‘信賴’의 한자어를 들여다보면, 사람과 말, 그리고 믿음에 힘입다는 뜻이 걸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디 교육 현장에서만 그랬겠습니까? 각자가 몸담고 있는 삶의 일터에서 신뢰가 흔들리고 얼룩졌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신뢰는 단순한 ‘약속’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믿음, 사람에 대한 의지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믿음, 의지가 신뢰의 핵심인 것이지요. 대통령의 자리, 장관의 자리, 국회의원의 자리, 교수의 자리, 기업인의 자리, 직장인의 자리, 학생의 자리… 이 모든 곳에서 추상적이긴 하지만 상대방에 대한, 사람에 대한 예의, 믿음, 존경이 흔들렸던 한 해였습니다.

『역사의 종언』을 써서 화제가 됐던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트러스트(Trust)』구절이 스쳐갑니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대체로 불신이 만연할수록 사회적 거래 비용은 증대하고 공동의 이익을 실현할 기회는 줄어든다. 불신 사회에서 사람들이 협동하려는 시도는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 따라서 불신 사회에서 사람들은 협동하지 않는 반면 적자생존의 경쟁과 제로섬적인 갈등에 몰입하게 된다.” 그렇습니다. ‘불신 사회’에서 사람들은 “무익한 협동 대신 기만과 협잡, 배신 등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며, “다른 모두가 나를 속이려 한다면 나도 다른 모두를 불신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 불신 사회의 공통된 특징은 무엇일까요. 그 사회는 가족의 울타리 너머로 더 이상 신뢰의 연결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감시와 제재, 그리고 처벌의 위협만이 사람들을 정직하게 행동하도록 만들 뿐입니다. 후쿠야마는 이를 두고 ‘비극적인 균형 상태’라고 불렀습니다. 타인을 신뢰하는 사람은 불행하고 그래서 삶은 매우 암울하고 위태롭게 지탱됩니다. 어떻게 이 팽배한 불신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후쿠야마는 개인만의 결단이 아닌 여러 사람들의 ‘공동 행동’(공동 규범)을 통해 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후쿠야마의 주장을 모두 수긍할 수는 없지만, 그가 강조하는 ‘트러스트’의 의미는 ‘藏頭露尾’를 ‘2010년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현실에서는 여전히 곱씹어볼만합니다. ‘장두노미’의 의미는 비단 정치사회에만 해당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 전체에서 ‘신뢰’가 실종했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南과 北이, 與野가, 그런 정치권을 놓고 국민과 국민이, 종교와 종교가, 부부가, 부모자식이, 우리 개개인이 또 서로를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한 해가 소망스럽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분들의 한결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저는 우리 사회 곳곳의 ‘신뢰의 연결망’에 새살이 돋고, 이러한 신뢰의 구축 위에서 더욱 건강한 사회적 성숙이 가능해지길 소망합니다. ‘신뢰가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단순한 사실이, 우리를 그래도 희망 있는 사회로 안내하리라 믿습니다. 교수신문이 ‘신뢰의 연결망’ 회복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깊이 고민해보겠습니다. 대학인 역시 신뢰 깊은 너와 나, 우리를 만들어 가는데 논의를 깊이 천착할 수 있기를 또한 기대합니다.
신묘년 새해, ‘百尺竿頭 進一步’라는 저의 오랜 화두를 다시 던져봅니다. 더 건강하시고 소망의 결실 거두는 한 해 되시길 기원합니다.

이영수  교수신문 발행인/경기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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