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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풍경] ‘창작과 비평’통해 확산된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 읽기
[책들의 풍경] ‘창작과 비평’통해 확산된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 읽기
  • 교수신문
  • 승인 2002.05.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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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5-28 13:42:09
임영봉 / 문학평론가·중앙대 강사

문제는 리얼리즘인가 모더니즘인가. 서기 2002년, 지구화 시대의 도래라는 새로운 문학적 환경변화 속에서 동시대 한국 문학의 진로를 묻는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이 다시 재개될 기미를 보이고 있다. 1990년대 중반 무렵 진정석에 의해 전통적인 의미의 리얼리즘·모더니즘에 대한 동시적 넘어서기가 제기됨으로써 재개된 이 논쟁은 소강상태를 보이던 중, 최근 들어 임규찬 성공회대 교수(국문학), 윤지관 덕성여대 교수(영문학), 황종연 동국대 교수(국문학)에 의해 그 불씨가 다시 지펴지고 있다.

비평적 지평의 갱신에 대한 초조감

불씨를 제공한 당사자는 임규찬 교수다. 그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둘러싼 세 꼭지점’(창작과 비평, 2001년 겨울호)에서 윤지관, 황종연, 최원식 교수의 비평행보와 관련해 이들 비평가 각각의 비평적 입론에 해당하는 리얼리즘, 모더니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론에 대한 비판을 감행했다. 먼저 윤지관 교수에 대해 그는 민족문학과 리얼리즘에 대한 흔들림 없는 자부심과 근본적 문제의식에는 동의하지만, 이해와 인식에 있어서 문제가 있음을 제기한다. 자유주의를 모더니즘에, 당파성을 객관성에 연결짓는 이해의 단순함을 지적하면서 그것이 80년대적 인식론의 기계적 확장이라는 비판을 가한다. 리얼리즘을 지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지이기도 한 자신이 보기에 윤지관 교수의 리얼리즘에 대한 이해는 원론적 차원에 머물고 있으며 이러한 문제는 작품 읽기에 그대로 연장돼 ‘도식적 평가’에 이른다는 것이다. 윤 교수의 이론주의-원론주의 경향을 비판하면서 임 교수가 제기하고 있는 것은 “스스로 담지하고 있다는 리얼리즘론을 근원에서부터 재구축해야 할 필요성”이다.

황종연 교수에 대해서는 그가 가진 “유연화와 폭넓음은 미덕은 될지언정 그 자체가 비평의 정당성과 객관성을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다”라는 평가에서 출발, 황 교수의 비평적 원경을 이루는 버먼식 모더니즘론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다. 버먼의 모더니즘론이 모더니티에 대한 안주 형태라면, 리얼리즘은 그 극복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근대성의 체험에 충실하면서 버먼보다 더 확실하게 근대의 극복을 지향하는 예술이념”이다. 임 교수는 황 교수의 리얼리즘 이해가 모더니즘을 중심에 둔 버먼식 흡수통합론에 근거한 것으로 리얼리즘에 대한 한계선언을 통해 자신의 모더니즘론을 정당화하는 방편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황종연 교수의 모더니즘은 각개 작가의 문학세계를 규정하고 있는 사회적 성격과 관계라는 “근원적인 차이를 무시한 채 단순히 스타일의 유사성이나 기법의 유사성으로 동일성의 논리를 구상”하게 만든다. 황 교수가 일정한 의미를 부여한 장정일과 윤대녕 문학에 대해 임 교수는 “사회병리현상을 미적으로 변형한 단순재현물”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내리면서 개인과 사회를 통합할 수 있는 근대 극복의 미학은 리얼리즘임을 재강조하고 있다.

최원식 교수의 회통론에 대한 임 교수의 평가는 대단히 호의적이다. 이는 그의 현재 입장과 숨겨져 있는 고민을 드러내고 있는 대목인데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을 중심에 둔 최 교수의 작업에 대해 ‘장관’이라는 단어를 연발하고 있다. “문제는 오늘이다. 우리의 ‘움직이는 현실’(생성으로서의 리얼리즘론) 자체를 곤혹스럽게 만든 면, ‘곤혹’이 아니더라도 문학 자체의 현재성을 감안할 때 마냥 지켜보며 그의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임 교수의 발언은 리얼리즘의 갱신에 대한 갈망과 초조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지만 그가 기대하는 ‘새로운 리얼리즘론’은 여전히 희망 사항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임규찬 교수의 이런 비판 행보에 대해 윤지관 교수는 ‘놋쇠하늘에 맞서는 몇가지 방법’(창작과비평, 2002년 봄호)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그는 자신이 리얼리즘을 중심에 둔 모더니즘의 통합을 기획하고 있다는 임 교수의 지적을 인정한 뒤,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을 일면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반박을 가한다. 이 글에서 되풀이되고 있는 윤 교수의 관점은 “겉으로의 적대에도 불구하고 모더니즘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리얼리즘일 수밖에 없다”는 신념의 형태이다. 그 앞에서 모더니즘은 “리얼리즘이 자기실현을 위해서 뚫고 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하나의 도전으로서 존재한다.”

그는 90년대 모더니즘의 가능성을 재는 척도로 백민석과 장정일을 거론하고, 이들이 보여주는 문학적 모험이 모더니즘의 실험정신을 통해 추구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그 실험성이 관습적 기법과 병적인 세계관에 침윤돼 활력을 상실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차원에서 윤 교수는 황종연 비평을 90년대의 반이성적인 서사에 대한 ‘충실한 해설’로 규정하고 그의 비평이 90년대적 ‘혼돈’에 대한 지나친 의미부여를 하고 있다는 비판을 가한다.

새로운 미학을 위한 생산적 대화 기대

논쟁은 윤지관 교수에 이어 황종연 교수가 팔을 걷어부치고 나섬으로써 본격화 될 것 같다. ‘모더니즘에 대한 오해에 맞서서’(창작과비평, 2002년 여름호)라는 글을 통해 황 교수는 임규찬·윤지관 교수의 비판이 통념의 극복과 대화의 촉진에 기여한 점을 인정하지만 “당연히 필요한 사고의 전환을 기대한 만큼은 이룩하지 못했다”는 점을 먼저 지적하고 있다. 황교수는 자신의 작품 해석문제와 관련, “문학작품을 다루면서 스타일이나 기법보다 사회적인 의식이 더욱 ‘근원적인’ 문제라고 보는 것은 동의하기 어려운 리얼리즘론의 편견”임을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임규찬·윤지관 교수류의 사고는 “선언의 차원에서는 매번 갱신을 다짐하고 있지만 사고의 차원에서는 줄곧 보수에 머물고 있는 한국 리얼리즘론의 답답한 실정”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황 교수는 현재 제기되고 있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론 또한 의심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데, 그 저변을 이루고 있는 것이 “모더니즘의 업적을 리얼리즘의 이념으로 흡수해 리얼리즘의 판도를 넓히는 일종의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황 교수는 자신이 기대고 있는 버먼의 모더니즘론에 대한 해설을 하면서 ‘근대의 삶을 그 열려있는 전체성에 충실하게 살려는 시도가 모더니즘’의 핵심임을 재강조했다. 그의 모더니즘 옹호는 유동성과 유연성을 본질로 삼고 있는 ‘액체 근대’의 이미지 속에 함축돼 있다. 윤지관 교수의 태도를 두고 “리얼리즘 원론주의자의 강직한 신념이라기보다 모든 것이 녹아버리고 날아가는 근대의 와중에서 뭔가 단단한 것을 붙잡으려 애쓰는 문학적 난민의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고 지적함으로써 황 교수는 리얼리스트들이 갖고 있는 고체 근대의 이미지와 경직된 사고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모더니즘의 이념은 배격하지만 작품의 성취는 포용한다는 리얼리즘 쪽의 입장에 대해서도 황 교수는 “그것은 리얼리즘이라는 용어가 문학작품을 분별하고 문학의 기준을 만들려는 노력에 별로 쓸모가 없음을 스스로 밝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면서 궁극적으로 리얼리즘의 재구성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번 논쟁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사이에 놓여 있는 세계관의 근본적인 대립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고 있다. 주목을 요하는 대목은 이번 논쟁의 경우, 90년대 이후 守成에 치중하던 리얼리즘 진영으로부터 제기됐다는 점이다. 이번 논쟁에는 시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리얼리즘 미학-리얼리즘의 갱신에 대한 강력한 열망이 거기에 표현돼 있다는 사실과 함께 논쟁 당사자들의 공통된 문제의식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은 자신의 역사 속에서, 그리고 상호영향을 받아가며 각자의 발전을 도모했고 도모하는 과정’(임규찬)이며 ‘언제나 의존할 필요가 있는 타자’(황종연)이다. ‘적의’ 대신 ‘성찰’의 요구에서 비롯된 이번 논쟁이 발본적인 ‘차이의 확인’을 통해 새로운 미학을 생산하는 계기로 작용할 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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