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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도서정가제와 책의 생명력
[문화비평] 도서정가제와 책의 생명력
  • 김기태 세명대·미디어창작학
  • 승인 2010.12.20 15: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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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기구 중에 ‘출판물 불법유통 신고센터’라는 게 있다. 말뜻 그대로 불법적으로 유통되는 출판물을 찾아내어 법적 조치를 취하는 것이 주요기능이다. 이른바 ‘사재기’를 통한 베스트셀러 만들기, 과도한 할인을 통한 유통질서 파괴 등이 단속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배경에는 출판문화산업진흥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도서정가제’가 자리 잡고 있다. 서점에서 책에 표시된 가격대로 책을 구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독자들에게는 의아한 대목이겠지만, 이미 중대형 오프라인서점과 더불어 동네서점이 대부분 사라지고 인터넷서점이 성업 중인 것을 감안한다면 ‘책값 할인’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할인 경쟁이 ‘좋은 책 만들기’가 아닌 오직 ‘팔리는 책 만들기’로 이어지면서 그 피해가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돌아간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에게 책은 신성한 존재로서 오랜 세월 동안 그 가치를 인정받아 왔다. 그렇기에 서점에서 책값을 가지고 흥정을 벌이는 일이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출판사에서 정한 가격 그대로, 책 뒤 표지에 적혀 있는 가격 그대로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왔으며, 이런 정가를 토대로 출판사에서는 각 서점과 위탁판매협약을 맺고, 그에 따른 마진율을 결정해 온 것이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책은 정가에 입각해서 소매서점과 독자들 사이에 매매가 이루어져 왔으며, 이를 가리켜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도서정가제가 정착됐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요사이 그러한 풍조가 완전히 변하고 말았다. 대형 할인매장을 중심으로 책값이 서서히 파괴되기 시작하는가 싶더니, 인터넷서점에서는 ‘정가 할인’과 ‘마일리지 제공’을 공공연히 내세우며 독자들을 현혹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참에 아예 도서정가제를 폐지하고 자율경쟁체제로 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드높이기에 이르렀다. 모든 소비제품에 할인 혹은 가격파괴가 만연해 있는 풍토 속에서 유독 책만큼은 값을 깎을 수 없는 품목으로 인식돼 온 것이 그 동안의 사정이고 보면 책값이 지켜지지 않는 변화가 불러온 파장은 상당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특히 출판업계로서는 매우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할 수밖에 없게 된 셈이다.

원래 도서정가제는 ‘재판매가격유지제도’라는 이름으로 불려야 마땅하다. 도서의 유통질서 확립을 위해 1977년 12월 1일부터 전국적으로 실시된 도서의 정가판매는 서점업계의 자율적인 결의로 실시되기 시작했으나, 1980년 12월 31일 ‘독점규제및공정거래에관한법률’이 제정되면서 동 법률 제20조 제2항에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저작물은 재판매가격 유지행위를 할 수 있도록 예외규정을 둠으로써 도서의 정가판매가 법률적으로 보장받게 됐던 것이다. 즉, 생산자→도매업자→소매업자→소비자 등 단계별로 생산자가 정한 가격대로 거래해 최종 소비자에게 판매한다는 의미인 ‘재판매가격유지’ 행위는 우리나라의 경우 도서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어 흔히 ‘도서정가제’라 부르고 있다.

이렇듯 다른 상품에는 일절 부여하지 않는 공정거래법상의 출판물에 대한 예외적 재판매가격유지행위의 제도적 인정은, 국가·민족의 정신문화적 총화인 출판물이 사유재이기에 앞서 공공재이며, 시장에서의 가격경쟁 부재로 인한 폐해나 역기능보다는 국민의 교육·교양 및 문화복지 증진에 기여하는 문화적 순기능이 훨씬 크다는 것을 법적으로 승인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처럼 20년 이상 뿌리내려 온 도서정가제가 20세기 말부터 불어 닥친 가격파괴 바람 및 디지털화 양상에 휩쓸려 존폐의 기로에 처하게 된 것은 시장경제원리의 추세에 비추어 보면 사실상 예견된 수순일 수도 있다.

이런 와중에 최근 출판관련단체들이 특정 인터넷서점의 도서정가 할인율을 문제 삼아 소송을 제기함으로써 ‘도서정가제 논란’을 다시 촉발시켰다. 구체적으로 해당 단체들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인터넷서점들이 신간도서에 경품 및 추가할인을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인터넷 쇼핑몰을 중심으로 과열되고 있는 정가 파괴 및 과도한 할인 경쟁이 도서시장의 판도까지 바꿔놓고 있는 것이다.

결국 무조건 완전 도서정가제로 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에는 어색한 시절이 시작됐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만일 하루아침에 도서정가제가 무너진다면 이미 그 흔적마저 지워지고 있는 소규모 서점들은 어떻게 될까. 실질적인 도서유통의 거점으로 기능해 온 동네서점들이 경쟁력을 잃고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면, 그리하여 인터넷서점이나 대형서점에서만 책을 구입해야 한다면 과연 더 많은 책이 팔리고 더 좋은 책이 선보이게 될까. 도서정가제를 둘러싼 의견들이 내포하고 있는 장단점에 대해 세밀한 분석과 접근이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바로 ‘책’의 본질과 생명력을 다루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김기태 세명대·미디어창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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