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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번역, 번역자의 철학 실천돼야 ... 고전 출간 경쟁이 향연 되려면
재번역, 번역자의 철학 실천돼야 ... 고전 출간 경쟁이 향연 되려면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0.12.20 14: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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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번역비평학회 동계 심포지엄 ‘세계문학전집 번역의 의의와 전망’

‘세계문학전집’이 다시 화두로 떠올랐다. 2005년 이후 꾸준히 ‘붐’을 이뤄왔던 세계문학전집을 놓고 한국번역비평학회(회장 전성기 고려대·불문학)가 작심하고 달려들었다. 지난 18일  ‘세계문학전집 번역의 의의와 전망’을 주제로 숙명여대 백주년기념관에서 열린 2010년 동계 심포지엄에는 세계문학전집과 첨예하게 얽혀있는 출판사, 번역가, 평론가가 참여해 다양한 주장을 쏟아냈다.


이날 심포지엄 제1부에서는 ‘세계문학번집의 의의와 번역’을 놓고 윤지관(덕성여대), 장은수(민음사), 신광현(서울대) 등이 세부 논의를 진행했다. 이어 제2부에서는 ‘세계문학전집의 전망과 번역’을 큰 틀에 놓고 이세욱(번역가), 조영일(문학평론가), 조재룡(고려대) 등이 번역의 문제점을 짚어냈다.


눈길을 끈 것은 2부 내용이었다. 문학평론가 조영일은 세계문학전집 출판 문제를 오래 전부터 고민해 온 소장 연구자답게 비판의 날을 세웠다. 그는 발표문「세계문학전집의 구조」에서 “최근 학계에서 이뤄지고 있는 ‘세계문학’ 논의는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첫째, 괴테가 말하는 ‘세계문학’과는 전혀 무관하고 둘째, 한국문학의 영향력 상실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국문학의 세계화’와 같은 관료적 발상이 아니라 ‘교양의 시대에 과연 문학은 가능할까’와 같은 물음”이라고 강조했다.


발제자로 나선 조재룡 교수 역시 최근의 세계문학전집 번역에 곱지 않은 시선을 던졌다. 조 교수는 발표문「번역 정글 잔혹사, 혹은 세계문학전집 번역 유감」에서 “2000년대 우후죽순처럼 기획되고 있는 세계문학전집은 그 엄청난 기획이나 방대한 분량, 참여한 출판사 가짓수의 넉넉함, 시장의 논리에 충실해 얻어낸 독자의 환대에 의지해서 제 절정을 맛보는 게 아니라, 번역의 윤리를 되새길 때, 독자에게 떳떳한 번역을 선보일 때, 번역의 역사에서 이정표를 마련해 놓은 번역가들의 앞선 작업을 존중할 때, 바로 그 때서야 예고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들보다 앞서 「번역의 대향연을 위한 제언」을 발표한 번역가 이세욱의 글은 ‘재번역’이라는 구체적 문제를 씨름했다. 그는 “독자들을 ‘오역의 진창’에서 허우적거리게 하는 수준 미달의 해석이나 남의 번역들을 조금씩 바꿔서 만든 위작이 아니라면 모든 번역은 원작의 가능세계들을 드러내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나는 번역가로서 특히 재번역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내가 보기에 재번역을 둘러싼 갖가지 문제들은 전집의 목록을 짜는 문제, 전체 구성에서 첫 번역의 비율을 높이는 문제와도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고 말했다. 문학작품이나 고전의 번역은 ‘재번역’이라는 새로운 세대의 도전 속에서 성숙해갈 수 있다는 시각에서 그의 발표문을 발췌했다(이세욱은 서울대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오를레앙 대학에서 불문학을 공부했다. 역서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연작 소설 『개미』(전5권), 『뇌』(전2권), 『신』 등 다수가 있다).

  지금 우리 출판계에는 재번역이 붐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제3자의 입장에서 이 현상을 가만히 지켜보노라면 ‘이건 아니다’ 싶은 구석이 적지 않다.


  우선 재번역과 ‘改漆’의 혼동이 이따금 눈에 띈다. 여기서 말하는 ‘개칠’은 70년대에 소설가 이문구가 『관촌수필』에서 한 주인공에게 붙였던 별명 ‘세계명작 개칠사’의 바로 그 ‘개칠’이다. 사계를 대표하는 ‘최고’의 번역자가 새로이 번역했다는 작품에서 정작 새로운 해석을 찾아볼 수 없는 경우가 있다. 혹시 주석에라도 그간의 연구 성과가 반영돼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보지만, 있으나마나 한 정보, 부정확한 지식, 작품의 맥락에 상관없이 백과사전이나 사전을 그대로 베껴놓은 정보, 외국의 주해본을 보고 잘못 옮긴 덕에 가까스로 표절을 면한 남의 것 퍼오기 따위가 눈살을 찌푸리게 할 뿐이다. 이럴 거면서 굳이 이 작품을 다시 번역한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나마 성과가 있다면 가독성을 조금 높였다는 것인데 이것 역시 좋게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예술혼이 깃들지 않은 반들반들함은 오히려 느끼한 기분이 들게 하기도 하니까. 이런 번역은 아무리 명성 높은 학자나 번역가의 작품이라도 재번역이 아니라 ‘개칠’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의 명성이나 출판사의 아우라를 이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권력형 위작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앞선 세대의 번역에서 성행했다는 생계형 위작도 문제지만, 권력형 위작은 마케팅의 위력을 빌려 더 진실한 다른 번역들을 뒷전으로 밀어낸다는 점에서 더욱 큰 문제를 야기한다.


  앞선 이들의 오역을 바로잡았다는 것으로 재번역을 정당화하는 사례도 종종 접할 수 있다. 사실 재번역의 충동은 일차적으로 앞선 이들의 과오를 보면서 배태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특히 동일한 오류들이 여러 판본을 거치면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상황을 접하면 누구나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힐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예단과 과장과 싸잡아 말하기는 금물이다. 남들이 미끄러진 자리에서 자기 역시 미끄러질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낭패를 볼 수도 있다. 실제로 이전에 나온 모든 번역의 오류를 바로잡았다고 주장하는 새 번역을 읽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번역자의 주장대로 이전의 오류들이 상당 부분 고쳐진 것을 확인하기는 했지만, 이전에 아무도 범하지 않은 새로운 오류들이 생겨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앞선 이들의 작은 실수를 바로잡는 일이라면 굳이 재번역을 통하지 않고도 가능하다. 자기가 발견한 실수들을 조목조목 적어서 번역자나 편집자에게 알려주는 것으로 충분할 수 있다.


  가끔 이미 숱한 번역이 나와 있는 작품을 다시 번역한 선배나 동료에게 물어본다. “그걸 왜 다시 번역하셨어요?” 내가 들은 대답은 대개 “내 버전을 갖고 싶어서요.”다. 자기가 좋아하는 위대한 작품의 ‘자기 버전’을 갖는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럴 만한 자격을 가진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하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일견 소박하고 당연해 보이는 이런 태도도 덧없는 특권에 너무 안주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특히 앞선 이의 훌륭한 번역이 아직 팔팔하게 살아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새 세대의 능력 있는 번역자에게는 ‘자기 것’에 대한 애착을 넘어서는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작금의 재번역 붐에서 무엇보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턱없는 ‘청춘 숭배’일 것이다. ‘새로운 세대의 감수성에 호소하는 번역’, ‘젊은 번역’의 기치 아래 죽지도 않은 늙은이를 내다버리는 ‘고려장’이 성행하고 있다. 젊음을 강조하는 슬로건들이 어느 정도는 대입논술을 준비하는 청소년들과 그 부모들을 겨냥했다는 것, 슬로건들 자체가 심오한 번역 철학에 바탕을 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더 초들지는 않겠다. 내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그런 슬로건들이 야기하는 폐해다.


  번역이 빨리 늙는 것은 사실이고 우리 사회의 언어가 빠르게 변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옛것을 싸잡아서 몰아내는 풍조는 우리 문화를 풍부한 것으로 만들기보다 더욱 빈약한 것으로 만들 가능성이 많다. 번역의 ‘새로움’은 모국어가 달라진 현실을 감안해 가독성을 높이는 데 있다기보다 기존 번역들의 안일한 해석들을 질타하는 과감한 도전에 있다. 만약 어떤 이가 기존의 관행을 깨고 17세기의 작품을 예스러운 느낌으로 읽을 수 있도록 일부러 의고적인 문체를 사용했다면, 그 낡은 언어가 오히려 진정한 ‘새로움’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몇 해 전 여러 언어에 두루 능통한 어느 젊은 고전 연구자의 놀라운 포부를 전해들은 적이 있다. 뜻만 통하는 『아이네이스』가 아니라 운율이 살아 있는 『아이네이스』, 판소리로 부를 수 있는 『아이네이스』를 만들겠다고 했다. 내가 하루 빨리 읽어보고 싶어 하는 번역들 가운데 하나다. 판소리는 옛것이지만 판소리의 리듬에 맞춘 『아이네이스』는 진정 새로운 번역이 아닐까. 반면에 요즘에 쏟아져 나오는 재번역들 가운데는 원작을 대하는 태도며 한국어의 표현력에 대한 도전의식이라는 면에서 옛 번역들보다 더 늙어빠진 것들도 적지 않다.


  가끔 한 세대 전의 번역들을 싸잡아서 매도하는 이들을 보게 된다. 자신이 학창 시절에 읽은 번역들 가운데는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보았다.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면 이 양반이 정말 학창 시절에 독서를 제대로 했을까 의심한다. 40~50년 전의 명번역들을 읽으면서 세상과 인생을 배우고 작가 또는 번역가의 꿈을 키웠던 나로서는 그런 주장에 쉽게 동의할 수 없다. 어미의 태를 열고 가장 먼저 나온 새끼, 즉 무녀리는 뒤에 나온 다른 새끼들에 비해 조금 모자라고 허약할 수밖에 없다. 번역의 무녀리도 대개는 그렇다. 문을 열고 나온 작품이면서도 이후에 나온 번역들에 비해 손색이 없는 특별한 무녀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은 어딘가 허술하고 모자란다. 하지만 나는 그런 무녀리들의 헌신과 열정도 우리가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번역사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앞선 세대의 번역은 거의 다 중역이라고 싸잡아 말하는 관행에도 나는 이의를 제기한다. 먼저 중역과 폴리글로트의 번역을 혼동해선 안 된다고 본다. 원어를 몰라서 다른 언어로 번역된 것을 다시 번역하는 것과 원어를 비롯한 여러 언어에 능통한 이가 다른 언어로 된 번역들을 참조하며 번역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어쩌면 하나의 외국어에 능한 번역자보다 여러 언어에 능한 번역자가 더 좋은 번역을 만들 수도 있다. 영어권의 세르반테스 번역자들은 프랑스어에도 능통한 경우가 많았고 실제로 프랑스어 번역에서 도움을 얻기도 했다지만, 그렇게 해서 나온 영어 번역들을 중역이라고 얕잡아 말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우리나라의 가톨릭 신학교에서 라틴어와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를 배운 번역자라면 단테를 번역할 수도 있고 세르반테스를 번역할 수도 있고 아우구스티누스를 번역할 수도 있다. 만약 그런 분의 번역에 ‘중역’이라는 딱지를 붙여 폄훼하려는 이가 있다면, 그건 천재가 있음을 알지 못하는 범상한 자의 쩨쩨한 용훼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옛 번역이 오늘날의 번역보다 훌륭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벌이는 번역의 대향연에 옛날의 훌륭한 번역을 위한 자리도 마련돼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새로운 세대의 감수성에 영합하기 위해 옛것과의 단절을 기도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조금 출세했다 해서 가난한 부모를 업신여기는 못된 자식들처럼 굴기보다는 우리보다 더 정직하고 더 헌신적이었던 부모들의 고결함을 새로운 세대가 알게 해야 한다. 내가 젊은 번역자들과 함께 시작하고자 하는 일이 한 가지 있다. 우리의 옛 번역 가운데 정말 좋은 것들을 다시 읽고 그것들을 기리는 일이다. 우리에게도 위대한 번역이 있었다는 것, 우리에게도 기릴만한 님이 있다는 것을 젊은 세대에게 알리는 일이다. 젊은 것만 밝히는 시류를 거슬러 늙은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주고자 한다. 한국 번역사의 무녀리들이 열악한 환경에서도 한국어의 표현력을 높이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는지 입증하고자 한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청춘임을 노래하고자 한다.


  내가 읽고 싶은 재번역은 서문을 통해서든 해설이나 후기를 통해서든 번역자의 철학이 표명되고 번역문을 통해서 그 철학이 실천된 작품이다. 이미 여러 차례 번역된 작품을 자기가 왜 다시 번역했는지, 자기는 원문의 문체와 리듬을 어떻게 이해했고 그것을 어떻게 한국어로 되살려냈는지, 자기의 해석은 어떤 점에서 새로운지, 앞선 이들의 노고는 어떤 점에서 상찬할 만한지, 원작을 둘러싼 그간의 연구 성과를 번역에 어떻게 반영했는지를 자세하게 밝힌 번역자들의 글을 보고 싶다. 그런 글을 담은 획기적인 재번역들이 많이 나와서 이전의 훌륭한 번역들과 상보 관계를 이룰 때라야 지금의 고전 출간 경쟁은 진정한 번역의 향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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