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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사] 글쓰기의 어려움에 대해서
[학이사] 글쓰기의 어려움에 대해서
  • 교수
  • 승인 2002.05.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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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5-28 13:01:33

쓰기와 갈수록 멀어지고 있다. 한 때는 대단한 작가라도 될 기세로 혈기방장 글을 써댔으나 직업상 쓰는 논문 외에 心思를 분출하는 글을 쓴 기억이 아득하다. 중국문학을 본격적으로 전공하면서 전통 문인들이 강조해온 ‘글이란 그 사람[文如其人]’이란 엄숙주의가 저도 모르게 깊게 자리잡았기 때문인 것일까. 揚雄의 말대로 “말은 마음의 소리, 글은 마음의 그림, 그 소리와 그림 모습에 군자와 소인이 드러나는 법”, 생명력 있는 글을 쓰고자 한다면 먼저 제대로 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어찌 쉽게 글을 쓸 수 있겠는가. 아무리 빼어난 장인의 멋들어진 기술로 이뤄낸 비단이나 요리처럼 현란하고 달콤한 수사가 빛날지라도 자신만의 깊은 성찰과 체득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글이라면 어찌 ‘文質彬彬’의 참맛을 느낄 수 있겠으며, 삶의 체득이 진한 울림으로 솟아나는 글일 수 없다고 생각하면 어디 잡문 쓸 겨를이 있단 말인가. 스스로도 고루하게 느껴지는 억지 변명 소지가 없는 게 아니지만, 어쨌든 글쓰기를 두려워하는 증세는 이미 뿌리가 깊어졌다.

과연 글과 사람은 따로인가, 아닌가. 글만 읽으면 되는 것인가, 작가도 동시 평가되어야 하는가. 근간 미당 사후 벌어진 한 바탕 논란, 이문열씨 언행에 불만을 품은 독자들이 벌인 작품 반환 운동도 사실 이 문제의 표출이다. 청대  自珍이 시와 시인이 서로 이름 날리게 한 경우를 예시하면서 “이들 모두 시와 그 사람됨이 일치되고 있다. 그 사람을 벗어나서 시가 없고, 그 시를 벗어나서 그 사람이 없으니 그 면모가 확실하다”고 강조하는 대목은 작품을 통해 글쓴이의 심사와 인격을 읽어내는 일을 줄곧 강조해온 중국문학 비평에서 보면 흔한 예일 뿐이다. 그러나 작가 품성과 작품 내용이 반드시 일치하는가 하는 것도 문제다. 명대 都穆이란 비평가는 元好問의 시에서 權臣에게 철저하게 아부했던 潘岳의 ‘閑居賦’란 작품이 천고의 고아한 정취를 담아내고 있다고 한 예를 들며, “말과 글로 사람의 인품을 완전히 살필 수는 없는 것 같다”고 지적한다. 결국 글이란 대개는 그것을 쓴 이의 인품의 반영이지만, ‘늑대가 토끼를 낳는’ 경우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 사실이다.

글과 사람 관계의 이러한 현상 인식은 자연스럽게 ‘앎과 실천’, 이른바 知行合一 문제를 떠올린다. 지식인의 표리부동, 이중성이 심각한 현실 때문이다. 예컨대, 강단 안팎에서 온갖 도덕 가치며 민주 운동이며 사회 평등을 외쳐 주위의 존경과 신망을 얻고 있다고 자부하는 교수이지만, 정작 학과 새 식구를 초빙할 때는 조폭 세계 뺨 칠 정도로 패거리주의를 내세우기 일쑤다. 아무리 正道를 들어 설득해도 오히려 온갖 교언영색으로 합리를 가장하니, 기가 막힐 일이다. 이게 어디 한 두 사람 솎아내 해결될 문제인가. 지금은 비록 전에 비해 많이 나아졌다 하나, 아직도 오죽하면 관청에서 나서서 열 명 중 몇 명 이상이 초록동색이면 엄벌하겠다고 끊임없이 강조할 정도다.

번은 ‘인간과 가치’라는 교양과목 시험 감독을 들어갔다가 쪽지들을 손바닥 새에 끼워 놓고 부정행위를 하려는 학생 두어 명을 들춰낸 적이 있다. 어떤 시험에서나 부정행위는 나쁘지만 ‘인간과 가치’라는 제목과 부정을 위한 쪽지의 대비가 하도 선명하고 기가 막혀 그 쪽지들을 지금까지 책상에 놓고 화두로 삼고 있다. 우연한 일일까. 그들의 교재는 이 아무개 씨가 쓴 것이었는데, 그는 ‘앎과 함’을 교육철학적으로 펼쳐내다가 군사독재정권 시절 관계에서 출세한, ‘이론과 실천’을 병행했던 사람이다. 나중에 그 과목을 담당하는 철학과 교수와 마주친 자리에서 ‘하필이면 피묻은 정권의 손을 잡은 그런 사람 책으로 인간과 가치를 가르치느냐’고 농담처럼 물었더니, ‘학문과 사람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냐’고 정색하며 쳐다보는 것이었다.

힘은 세되 대개는 흙탕물인 질풍노도와 같은 글보다는 가을 강처럼 삶의 내면을 투사할 수 있는 글 생각을 하다보니 자꾸만 글쓰기에서 멀어진다. 거짓 글, 거짓 실천이면 아니 되겠다는 다짐의 말만 하다가 말이다. “말보다 앞서 실천하기, 실천한 후 말하기[先行其言, 而後從之]”, 공자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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