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04:10 (금)
그는 왜 20년동안 맨체스터에서 공장주 노릇을 했을까
그는 왜 20년동안 맨체스터에서 공장주 노릇을 했을까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0.11.29 14: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화제의 책] 트리스트럼 헌트 지음, 『엥겔스 평전』(이광일 옮김, 글항아리, 2010.11)

책의 쪽수는 680쪽. 저자는 1974년 생 영국의 소장파 역사학자 트리스트럼 헌트 런던대 퀸 메리 칼리지 역사학부 교수다.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지냈던 이광일 씨가 번역했다. 솔직히 말하면, 저자의 내공이 부럽다. 19세기 영국 정신사로 케임브리지대에서 박사를 한 그의 주된 관심사는 ‘도시사’이다. 옮긴이가 이 책을 두고, “마르크스 전공자나 역사학자 그 누구도 손대기 어려운 책이다. 19세기 유럽의 풍경을 오밀조밀하게 펼쳐내면서 거기에 엥겔스의 내면을 짚어냈기 때문”이라고 말한 게 조금 이해된다. “마르크스와 달리 엥겔스에게는 드라마틱한 인간적 삶이 있었다. 평전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고 옮긴이는 말한다.

그간 여러 편의 마르크스의 평전이 소개됐다. 프랜시스 윈의 『마르크스 평전』(정영목 옮김, 푸른숲, 2001), 자크 아탈리의 『마르크스 평전』(이효숙 옮김, 예담, 2006)등과 평전은 아니지만, 이사야 벌린의 『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안규남 옮김, 미다스북스, 2001), 데이비드 멕렐렌의 『칼 마르크스의 사상』(신오현 옮김, 민음사, 1989) 등이 있었다. 이렇듯 마르크스에 대한 ‘대접’은 자주 있어왔지만, 그의 사상적 동반자이자 평생지기 였던 맨체스터 면직공장 공장주 엥겔스의 평전이나 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1970년대 중반 영국 역사학자 E.P. 톰슨의 말에서 ‘엥겔스 외면’ 현상의 배경을 엿볼 수 있다. 톰슨은 “마르크스와 레닌은 항상 결백하다면서 엥겔스만 피고인석에 올리는 짓거리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한 바 있다. 헌트의 엥겔스 평전은 여기서 출발한다.

엥겔스는 요즘말로 꽃미남 같은 매력이 넘치는 신사였다. 키는 183cm쯤 됐고, ‘맑고 밝은 눈’에 검고 윤기 흐르는 머릿결을 가졌다. 몸은 아주 유연했고, 여우사냥을 즐겼으며, 프록코트를 자주 입었다. 삶은 이렇듯 호사스러웠지만, 그가 지향한 정신은 새로운 세계에 서 있었다. 저자는 헤겔의 저작을 만남으로써 엥겔스가 사회주의로 향하는 길을 만나게 됐다고 말한다. 

엥겔스는 지극히 모순적인 삶을 살았고 무한한 헌신으로 일관했다. 그는 실천의 힘을 믿었고, 자신의 혁명적 공산주의 이론을 온몸으로 실천하고자 했다. 그러나 젊어서 마르크스를 만난 이후 그의 천재성과 공산주의라는 더 큰 대의의 성취를 위해 개인적 야망을 접기도 했다. 그는 인생의 황금기 20년을 맨체스터에서 그토록 하기 싫어했던 공장주 노릇을 하면서 보냈다. 마르크스가 생활 걱정 없이 『자본론』을 끝낼 수 있도록 재정 지원을 해주기 위해서였다.

‘샤토 마고’를 즐기던 183 cm의 꽃미남

그는 마르크스를 끔찍이 위해주는 과정에서 종종 모순적인 삶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저자 는 그러한 삶의 모순성 자체가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핵심에 닿아 있다고 해석한다. 옮긴이 역시 엥겔스의 그런 모순성을 흥미롭게 읽어냈다. “프랑스산 최고급 포도주 샤토 마고가 끊이질 않았어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공장이었고, 거기서 나온 소득이었지만 부모에겐 불효했던 인물이죠. 생활은 호사스러웠지만, 마르크스의 가족에겐 정말 아낌없이 퍼부었어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요.”

엥겔스의 지적 성장 과정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1841년 9월 프로이센 군대소집영장을 받고 일선에 배치된 그 무렵이다. 그가 배치된  베를린은 지방 부르주아 직물업자의 아들인 엥겔스가 이상을 펴나가는 데 필요한 무대가 됐다. 베를린 대학 6호 강의실이 바로 그곳이다. “엥겔스는 걸핏하면 연병장을 빠져나와 베를린 대학 캠퍼스로 달려가 여러 가지 공부에 몰두했다. 후일 어지간한 대포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파괴력을 발휘할 내용들이었다.” 베를린 대학 6호 강의실에서 엥겔스는 ‘청년 철학 독학도’를 자처했다. 그 옆으로는 곧 예술사가이자 르네상스 연구가로 대성할 야콥 부르크하르트, 미래의 아나키스트 미하일 바쿠닌,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있었다. 또한 은발에 푸른 눈을 한 셸링이 자신의 영웅인 헤겔을 가차 없이 비판하는 것에 매료되기도 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집필을 돕기 위한 방편으로 엥겔스는 1840년대 맨체스터에 발을 굳게 딛는다. 맨체스터는 엥겔스가 지적이자 이데올로기적인 진전을 이룬 또 하나의 정신사적 공간이었다. 공장, 증권거래소, 빈민가, 술집 등등을 드나들면서 엥겔스는 산업화의 현장을 피부로 체감했다. 베를린이 강의실과 술집에서의 토론으로 점철된 정신의 도시였다면, 맨체스터는 물질의 도시였다. 길거리 곳곳에서 계급 분열과 무자비한 자본주의의 실상을 목격했던 것이다. 이후 맨체스터 체담 도서관은 『독일이데올로기』를 낳게 된다. 

 
마르크스와 함께 그 이론을 다지고 혁명을 전파했던 엥겔스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파격적이고, 보헤미안적이면서 여자들이 우글거리는 분위기를 좋아했고, 마르크스의 딸들과 같이 있는 것을 행복해 했다. 쾌활함을 삶의 미덕으로 삼고, 샤토 마고 1848년산 와인을 마실 때 행복하다고 말하던 엥겔스. 그런 그의 삶의 모토는 ‘쉬엄쉬엄 하자’였다. 엥겔스는 죽어서 유언장에 지시한 것처럼 한줌 재로 돌아가 영국 해협에 뿌려졌다. “모순으로 가득하지만 매혹적인 삶을 살았고, 평생을 무한한 희생으로 일관한 인간 엥겔스는 그렇게 갔다.”

개성을 열정적으로 옹호했던 혁명가

공산주의 이론은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역사적 평가를 받았다. 2007년 금융 위기 이후 독일 등 유럽권에서 마르크스가 새롭게 읽히고 있지만, 그것은 “마르크스의 사유방식 전체는 어떤 가르침이라기보다는 방법”이라고 엥겔스가 지적했던 바로 그 대목에서 유효할 것이다.  “행복한 인생을 열망했고, 개성을 열정적으로 옹호했”던 사상가. 소수의 전위대가 주도하는 톱다운 방식의 혁명에 매우 회의적이었던 운동가. 지식인과 혁명가들이 아니라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노동자들의 黨만이 진정한 변화를 가져온다고 믿었던 혁명가. 풍문에 떠돌던 엥겔스의 삶이, 회색의 이론을 비집고 헌트에 의해 피와 살이 돌기 시작했다.

사족 하나. 옮긴이가 꼼꼼하게 단 주석과 찾아보기는 값진 노력의 결실이다. 책이나 논문 제목에서 오류가 있다면, 그건 역자의 잘못이 아니라 아직 어떤 통일된 번역 용어를 정립하지 못한 학계에게 따져야 한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