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중 시인은 “손을 움켜쥐면 주먹이요, 펴면 단풍잎입니다.”라 했다. 여태 내 손이 단풍잎인 것도 모르고 살았네!
어쨌거나 滿山紅葉이다! 뭇 산이 울긋불긋 가을단풍 옷으로 갈아입었다. 하지만 저 현란한 단풍 숲속에 황혼과 조락이 깃들었으니……, 황혼이 제아무리 아름다워도 그 뒤엔 어둔 밤이 기다리고 있다. 하물며 가을은 어김없이 하루에 30km 속도로 남녘으로 내려가고 봄은 20 km 빠르기로 북으로 올라온다 했다.
단풍나무(maple tree)는 아시아가 원산지로 세계적으로 129종이나 되며, 산지의 계곡에 주로 ‘自生’(‘서식’이란 말은 동물에 씀)한다. 열매는 껍데기가 얇은 막으로 날개를 달아 바람을 타고 팔랑개비처럼 팔랑거리며 멀리 흩어지는 翅果이고, 흔히 열쇠를 닮았다고 해서 ‘maple key’라 한다. 헌데 갈잎은 과연 무엇을 남기고 가는 것일까. 落葉歸根이라, 낙엽은 뿌리에서 생긴 것이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뒹굴 뿐인데 우리가 너무 큰 의미를 붙이는 것은 아닐까.
식물도 물질대사를 하기에 노폐물이 생긴다. 하지만 우리처럼 따로 콩팥 같은 배설기가 없어서 세포에 있는 液胞(vacuole)라는 작은 주머니에다 배설물을 모조리 담아뒀다 내다버리기에 늙은 세포일수록 액포가 더 크고 많다. 식물은 똥오줌을 제 이파리에다 담아둔다니 참 우습다.
허나 저 식물들은 되레 우릴 보고 ‘괴짜동물’이라 할 걸. 易地思之라고 내가 딴 생물로 바뀌어 자연을 보면 여태 못 보던 것이 막 보인다.
그런데 그 액포 속에 丹楓의 아름다운 색깔이 들어있다면 여러분은 믿겠는가. 터질듯 부푼 액포 안에는 카로틴(carotene)이나 크산토필(xanthophyll), 타닌(tannin)같은 색소는 물론이고 花靑素(anthocyanin)라는 화학물질에다 달콤한 당분도 녹아 들어있어서 잎을 물들인다.
단풍 빛은 꽤나 복잡하게 얽혀 결정된다. 광합성에 쓰였던 이들 보조색소들이 여름 내내 싱그러운 葉綠素에 가려 있다가 난데없는 추상같은 냉기에 엽록소가 녹으면서 시나브로 겉으로 드러난다. 카로틴은 잎사귀를 당근같이 붉고 누르스름한 색을 내게 하고, 크산토필은 은행잎처럼 샛노랗게, 타닌은 갈색이나 거무스름하게 잎을 염색한다. 그리고 꽃물을 드리기도 하는 화청소는 액포(세포)가 산성이면 붉은색 쪽을, 알칼리성이면 푸르스름한 색 계통을 내게 한다.
그런데 액포에 당분이 많으면 많을수록 화청소와 당이 결합해 단풍의 發色이 훨씬 더 맑고 밝다. 가을에 청명한 날이 길면 당이 많이 만들어져 단풍이 더 예쁜 것. 알록달록, 붉으락푸르락 제 아무리 눈을 홀리는 단풍도 알고 보니 서너 가지 색소에다 안토시아닌, 당분의 양에 매였구나.
그리고 캐나다국기에 단풍 나뭇잎이 그려져 있음을 안다. 캐나다에 가면 선물될 만한 것에 ‘단풍시럽(maple syrup)’이 있으니, 서양당단풍(sugar maple, Acer saccharum)에서 진액을 뽑아내어 달이는데, 단풍시럽 1ℓ를 만드는데 40ℓ의 樹液을 조려야 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단풍나무는 재목으로 쓰고 생선 등 음식을 훈제(smoking)하는데도 제격이라 한다.
그지없이 황홀하게 가을을 수놓는 붉은색은 주로 갈잎큰키나무인 단풍나무들 몫이다. 우리나라 단풍나무를 세세히 나누면 30종이 된다는데, 크게 보아 다섯 부류로 나뉜다.
잎 둘레에 ‘손가락’에 해당하는 기름한 삼각형의 조각 잎인 裂片(lobe)이 11개인 것이 섬단풍, 9개는 당단풍, 7개를 단풍, 5개 고로쇠(봄에 고로쇠액을 뽑음), 3개가 신나무다. 그 중에서 당단풍이 제일 붉다. 허투루 하는 빈말이 아니다, 나무도 제 이름을 불러주면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고 뱅긋뱅긋 웃으며 반긴다고 한다!
여러분은 이런 조잡한 글에 너무 한눈팔지 말고 연구실 창밖으로 눈을 돌리거나, 멀리 교외로 나가 다시 못 올 이 근사한 가을을 한껏 즐겨보시라.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생물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