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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역과 왜곡은 경전의 권위 팔아먹는 지식사기다”
“오역과 왜곡은 경전의 권위 팔아먹는 지식사기다”
  • 기세춘 한학자
  • 승인 2010.11.08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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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를 위한 변명

오늘날 책방에 나와 있는 『논어』 번역서들은 하나같이 공자의 경세치학은 고사하고 이를 계승·융합한 후대의 업적조차 담고 있지 않으며, 각자 제 입맛에 맞는 처세훈으로 변질·타락시킨 것들뿐이다. 처세훈이란 봉건 왕조 시대건, 일제 식민 시대건, 자본주의 시대건 그 밥에 그 나물처럼 비슷비슷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지금 책방에 나와 있는 『논어』를 아무리 읽어도 공자의 본래 모습은 볼 수 없고, 묵자·맹자·노장은 물론 서양의 성자들과도 하나같이 닮은꼴로만 느껴진다. 이러한 유교적 처세술과 격언집으로 타락한 고전 해석은 속물화·물신화를 조장할 뿐 백해무익하다.

그러나 반성은커녕 한술 더 뜨고 있다. 몰역사적인 인기 상품이었던 처세훈도 신물이 날 정도로 물리게 되고 자본주의 시대 CEO들의 새로운 성공담에 밀리게 되자, 그들은 아예 공자를 훌륭한 경영인으로, 더 나아가 섹시한 사내로 캐릭터를 날조하여 가짜 상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중에 성공한 것이 KBS의 <도올의 논어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묵은 유교적 교훈담을 새로운 자본주의적 교훈담으로 왜곡시킨 속임수일 뿐이다. 왜냐하면 공자의 가치 지향은 그 방법과 목표에서 서양과는 전혀 다르며, 역사적으로 공자 시대는 물론이고 최근의 개혁·개방 이전까지 중국은 서양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를 경험한 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는 동아시아의 공업화를 유교문화에서 찾으려는 일부 학자들의 소식에 고무된 나머지 아예 『논어』를 자본주의 성서로 왜곡해 이에 영합하려는 약삭빠른 상술일 뿐이다.

공자와 『논어』는 천여 년 동안 우리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상서이므로 『논어』를 왜곡한다는 것은 우리의 역사와 조상을 조롱하는 것이 된다. 더구나 『논어』원문을 제시하면서 자기 입맛대로 왜곡하며 소설을 쓰는 것은 학계의 수치만이 아니라 곡학아세의 죄악이다.

또한 ‘소설 논어’라고 하더라도 역사적 인물을 다루는 것이므로 『삼국지연의』처럼 적어도 코끼리를 고래의 모습으로 그리는 정도쯤의 사실과 비슷한 구석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도올의 ‘소설 논어’는 마치 기린의 목에 거북이 발을 달거나, 곰의 몸에 모기 다리를 붙이는 꼴이다. 소설이란 사실보다 더욱 사실 같은 허구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의 『논어』이야기는 소설도 아니다. 역사 서술이나 경전 번역에도 상상력은 필요하지만 지금까지 간과했거나 새로 발견된 사실을 기초로 빈칸을 메워 캐릭터를 구성해 보는 것일 뿐, 아무 사료도 없이 자기를 닮은 인물을 공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이 이처럼 『논어』를 은유적인 禪이나 소설로 보는 것은 서구의 해체주의에 대한 소화 불량증 때문으로 보인다. 섣부른 해체주의의 세례를 받은 그들은 경전도 선문답이나 소설과 다를 것 없으므로 제 마음대로 뜯어고쳐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나의 비판에 대해 60년대부터 대학가에서 유행한 서구의 해체주의도 모르는 고지식한 노인의 잠꼬대라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해체주의는 저자의 의도와 독자의 이해는 결코 일치할 수 없다는 독서 불가능성을 강조한다. 해체주의는 근본적으로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다는 불가지론적 입장에 서 있다. 설사 불가지론을 이해한다고 해도 번역은 기표의 문제이며 기의는 다음 문제다.

번역도 물론 일차적인 이해가 관건이지만 기호가 직접 지시하는 것을 넘어 다른 뜻을 전하려고 하는 은유가 많은 문학 작품의 이해와는 또 다른 차원이다. 노장처럼 은유와 우화인 경우와는 달리 공맹처럼 제도·정치와 관련된 도덕서인 경우는 기표의 외연과 내포가 분명하고 제한적이므로 번역도 엄격해야 한다. 그러므로 의도적인 왜곡은 해체적인 해석과는 다른 문제다. 원전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오역과 왜곡은 경전이라는 권위를 팔아먹는 지식 사기일 뿐 해체주의를 흉내 낸 재해석이라고 볼 수 없다.

□ 이 글은 『논어강의』(기세춘 지음, 바이북스, 2010) 서문인 ‘『논어』를 위한 변명’에서 발췌했다.

기세춘 한학자

1994년 신영복 선생과 공역한 『중국역대 시가선집』,문익환 목사와 함께 쓴 『예수와 묵자』를 냈다. 고전 재번역 운동의 일환으로 『장자』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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