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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와 ‘영화’라는 괴물에 맞섰던 식민지 엘리트의 서글픈 처세
‘근대’와 ‘영화’라는 괴물에 맞섰던 식민지 엘리트의 서글픈 처세
  • 이효인 경희대·연극영화학과
  • 승인 2010.10.18 1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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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의 영화활동, 어떻게 보나

첫번째 부인인 이귀례와 함께 한 모습<1932>.
일제 시기 임화의 영화 활동은 지속적인 것이 아니었다. 카프 이론가로서의 개성에 비한다면 차라리 무색무취한 것이기도 했다. 임화가 영화 「유랑」(김유영, 1928), 「혼가」(김유영, 1928), 「암로」(강호, 1928), 「지하촌」(강호, 1931) 등에 주연으로 출연했던 시기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1927년에 문예의 계급성 원칙(「분화와 전개」) 고수와 아나키즘 추방(「착각적 문예이론」)을 위해 맹렬히 싸운 직후이며, 그의 대표 시 「네거리의 순이」와 「우리 오빠와 화로」를 쓴 1929년 사이의 일이었다. 이후 그는 연기 공부를 위해 도쿄로 갔다가 1931년에 돌아오는데, 거기서 배운 것은 연기가 아니라 향후 카프 지도자가 갖춰야 할 사상교양이었다.

「유랑」 등 임화가 출연한 카프계의 영화는 현재 한 편도 남아있지 않다. 영화 소설이나 신문 기사 등을 통해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유랑」은 칠팔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주인공 영진이 빚에 팔려갈 처지인 순이와 어딘가로 떠나는 내용이며, 「혼가」는 해고된 노동자, 퇴학당한 고학생, 역마차의 화부 등의 인물이 겪는 사회적 갈등을 그린 작품이다. 또 「암로」와 「지하촌」은 각각 황폐한 농촌과 공장을 중심으로 빈농과 도시 빈민들의 투쟁을 묘사한 작품이다.

비평가와 시인, 그리고 영화배우의 삶

이 작품들은 혹독한 검열과 부실한 역량 탓에 대중적 호응은 물론 카프 내부의 호평 또한 얻지 못했다. 카프영화계의 대표적 평론가였던 서광제 등이 그토록 나운규 영화를 비롯해 많은 조선영화를 혹독하게 비판했는데, 왜 카프영화에 대해서 상대 진영에서 비판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는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카프 내부의 비평 또한 윤기정의 비평과 임화의 「화륜」(1931) 비판 등만 있을 뿐이다. 「유랑」의 주인공 이름이 ‘영진’이며 그가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설정, 빚에 몰린 처녀와 마름 등의 설정을 고려하면 이 작품이 나운규 「아리랑」의 짙은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시기 임화는 무엇을 했을까. 임화는 주연 배우라는 역할에 도취한 나머지 작품 방향이나 내용에는 무관심했든지 아니면 그의 영화적 판단력 역시 일천했던 것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의 연기력에 대해 ‘형같은 친구였던’ 윤기정은 영화 「혼가」를 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기 역을 생각하지 않고 미남자로만 보이려고 화장을 너무 많이 한 것과 동작의 선이 가늘고 표정도 심각한 곳이 없”다고. 이 외 임화의 연기에 대한 기록은 발견하기는 어렵다.

임화가 1931년 카프의 볼세비키화를 주도하면서 계획한 조직(안)을 보면 자신의 위치를 서기, 조선프롤레타리아 연극동맹 책임자, 영화동맹원, 미술가동맹원 등으로 두고 있다. 이런 스스로의 자리매김을 보면 그는 명징했던 조직 이론가의 역할을 맡으면서 그의 처 이귀례와 함께 시각예술에 대한 열정을 실현하려고 했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임화의 이런 방침이 카프영화계에서는 먹히지 않았다. 서광제, 김유영 등이 카프의 하부 동맹으로 참가하기를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을 설립한 것이었다. 이에 임화는 영화 「화륜」을 비판하는 조선일보 평론에서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의 해체 권고를 무시해 카프에서 방출된 후 조선시나리오작가협회를 조직한 김유영과 서광제를 싸잡아 비난했다. 이에 서광제가 변명같은 반박을 조선일보에 실었는데, 그러자 서광제와 행동을 같이 했던 김유영 역시 같은 지면에서 서광제를 폭로 비판하는 글을 실음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된다. 이 일이 있은 후 서광제는 카프영화계를 거의 떠났으며, 다음해인 1932년에 (놀랍게도) 김유영과 함께 교토의 촬영소로 향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몇 가지 의문을 갖게 된다. 당시 임화가 주도한 신흥영화예술가동맹 해체 권고는 정당했는가. 서광제의 주장처럼 조선의 당시 정세에서 매개단체로써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의 존속이 오히려 현명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사실 카프 2차 검거의 계기가 된 연극단체인 신건설사 활동은 대중과의 접촉면을 넓히려는 활동이었는데, 신흥영화예술가동맹 또한 이러한 기조에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카프 2차 검거가 시작되자 카프는 와해상태에서 각 동맹의 독자적 활동을 용인하게 되는데, 박완식 등이 1934년에 설립한 조선영화문화연구소 등은 조직을 보호하고 대중적인 활동을 꾀했던 것으로서 역시 ‘매개단체’의 성격이었다. 또 김유영이 앞의 조선일보 지면에서 노골적인 비판까지 하고선 어떻게 둘이 함께 일본으로 떠났을까. 만약 인간적 사과가 그 해결책이었다면, 그 사과 속에 담긴 ‘어쩔 수 없었던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 있다.    

카프지도자 이미지에 남은 얼룩

서광제는 임화가 훗날 「조선영화발달소사」(<삼천리>, 1941)에서 조선의 대표적인 영화평론가로 인정했던 인물이며, 누구보다 강경하게 프롤레타리아 영화를 주장했지만 최초의 친일영화라고 할 수 있는 「군용열차」(1938)의 감독을 맡았던 사람이다. 또 조선영화계에 정말 필요한 것은 제대로 된 기업이라는 이른바 ‘기업화론’을 1934년에 최초로 주장했던 인물이다. 임화의 「조선영화발달소사」역시 ‘기업화론’을 강조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임화는 1937년부터 ‘학예사’를 운영했는데, 이 출판사는 광산업자이자 조선영화주식회사 사장인  최남주라는 큰손 출자의 회사였다. 이후 「집없는 천사」(박기채, 1941)의 시나리오에서 조선어 부분을 집필(번역?)했는데 이 시기는 고려영화협회라는 영화사에서 작가인 니시가와 모토사다와 함께 촉탁으로 일하던 기간이었다. 고려영화협회의 촉탁이란 문필과 관련된 일을 하는 한편 일본 총독부와의 섭외를 담당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처럼 임화의 영화 활동은 카프 지도자의 이미지에 얼룩을 남기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것은 ‘근대’와 ‘영화’라는 괴물을 대적할 수 없었던 식민지 엘리트의 가혹한 운명이자 서글픈 처세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효인 경희대·연극영화학과

필자는 중앙대에서 박사를 했다. 주요 논문으로는 「카프영화인의 전향 논리 연구-서광제와 박완식을 중심으로」, 저서로는 『영화로 보는 한국의 사회문화사』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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