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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脚註를 읽는 재미
[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脚註를 읽는 재미
  • 심혜련 서평위원 / 전북대·과학학과
  • 승인 2010.10.18 15: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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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박사 논문을 쓸 때였다. 논문을 한 절씩 쓰고, 그리고 그것에 대해 지도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 때 지적받은 사항 가운데 하나가 ‘관련된 논의들을 좀 더 찾아보고, 본문에 실기 어려우면 각주처리를 하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 당시에 나는 각주에 질려있는 상태였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각주를 달려고 학위 논문을 쓰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내 박사 논문을 쓰는 것인지 헷갈리기도 했다. 심한 경우에는 논문 한 면에 본문에 해당하는 글은 달랑 세 줄이고, 나머지는 다 각주인 면도 있었다. 그렇다고 각주를 안 달수도 없고, 하여간 각주 때문에 무척 괴로웠다. 학위를 마치고 나면 절대 각주를 달지 않는 글만을 쓰겠다고 다짐한 적도 있었다. 물론 매우 허황된 꿈이었지만 말이다.

학술적인 글을 쓸 때, 이 각주가 문제다. 학술적인 글에서 자신이 인용한 또는 참조한 글의 출처를 정확히 밝히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사실 학문적 글쓰기는 이러한 훈련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각주는 꼭 인용한 또는 참조한 글의 출처를 밝히는 데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본문에서 서술하고자 하는 견해를 보충하기 위해서도 사용하고, 또 다른 견해가 있을 경우에 이를 본문에 서술하면 전체적인 흐름이 깨질까봐 각주로 처리하기도 한다. 이럴 경우 각주라는 형식은 매우 요긴하게 쓰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때 나는 각주가 많은 글이나 책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각주가 많은 글들은 나에게 읽어내야 하는 정보가 많은 일종의 ‘포토몽타주’와 같았기 때문이다. 본문과 동시에 각주를 읽다보면, 본문을 읽는 흐름이 자주 깨지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쪽 밑에 각주가 있는 형태를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 밑에 바로 보이는데, 안 읽을 수도 없고 해서 읽다 보면, 본문의 흐름도 깨지고, 본문 글씨보다 적은 글씨들을 보려면 눈도 아프고 해서 말이다. 그렇다고 책 끝머리에 각주를 한꺼번에 몰아놓는 형식도 좋지는 않다. 본문을 읽다가 매번 뒤를 찾아봐야 하는 수고스러움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학술적인 글이라는 게 사실 완전히 새로운 주제만을 다룬 논문일 수가 없다. 또한 이전의 논의들을 소개함과 동시에 비판하고, 이와 다르게 자신의 의견을 써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글에서 각주는 하나의 필요조건이다. 버릴 수 없는 필요조건이라면, 이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논의의 흐름을 위해 꼭 언급하고는 싶지만, 본문에서 서술했을 경우 논의가 약간은 흐트러질 수 있는 내용일 경우 각주로 처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나 또한 약간은 비겁하지만, 이런 맥락에서 각주라는 형식을 종종 사용한다. 특히 어떤 부분에서 비판이 예상될 경우, 나 역시 그러한 비판이 나오리라는 것을 예상했을 때, 이를 각주에서 미리 아주 살짝 언급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주 비겁하게 말이다.

그런데 요즘은 각주를 읽는 재미가 생겼다. 다른 각도에서 각주 읽기의 매력에 빠져들었다고 해야할까. 그 이유는 본문과는 다른 각도에서 또는 본문에서 보다는 다소 거칠게 각주에서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는 글들이 꽤 있기 때문이다. 그런 행간의 의도를 각주에서 읽어낼 때의 재미는 매우 크다. 일종의 정사 중심의 역사책을 읽다가 야사 중심의 역사책을 읽는 느낌이랄까. 또 본문을 몰입해서 읽다가 각주를 읽게 되면, 브레히트가 주장하는 일종의 소격 효과도 체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에는 시나 소설에도 하나의 창작 기법으로 각주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학문적인 글과는 각주의 성격이 다르다. 정확한 문헌을 인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각주에서 사용한 문헌 자체가 하나의 허구인 경우도 있다. 보르헤스는 자신의 소설에서 있지도 않는 문헌들을 참조했다고 쓰기도 한다. 각주 또한 가상의 이야기 공간으로 활용한 것이다.

그러나 꼭 필요하지 않은 각주들, 또는 맥락과 상관없는 각주들은 때로는 자신의 지식에 대한 현시욕으로 보일 때가 있다. 논문 심사를 하게 되면, 간혹 부정직한 각주들을 많이 보게 된다. 직접 읽은 책이 아니라, 간접 인용인 경우에도 마치 직접 읽은 것처럼 해놓고, 또 논문 맥락과는 상관없이 각주와 참고 문헌의 분량을 늘이기 위해 이렇게 저렇게 들어간 각주들을 보면, ‘각주, 니가 참 고생이 많다’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부정직한 각주들을 더 이상 보지 않았으면 한다.

심혜련 서평위원 / 전북대·과학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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