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旅路에 지친 영혼들의 시선을 머무르게 할 수 없다면
旅路에 지친 영혼들의 시선을 머무르게 할 수 없다면
  • 홍지석 객원기자
  • 승인 2010.10.11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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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지의 미술_ ② 출발과 도착: 역과 터미널, 공항의 공공조각

우리 주변 도로, 건물 여기저기에 정말 많은 미술작품들이 있다. 작가들은 어떤 마음으로 그런 작품을 거기에 설치했는가. 크게 두 가지 입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떤 작가에게 공적 공간은 단순히 자신의 작품이 전시될 확장된 형태의 미술관, 갤러리다. 이른바 조각 공원에 배치된 대부분의 미술작품 역시 이런 범주에 속할 것이다. 물론 이런 유형의 작품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도심의 공적 공간에 배치되는 일도 있다. 일례로 알렉산더 칼더는 도심 한 복판에 놓이게 될 자신의 작품 「위대한 속도」를 제작할 때 한 번도 현장을 방문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작품 자체의 완성도였고 작품이 배치될 현장의 이러저러한 문맥들은 처음부터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칼더처럼 탁월한 작가의 작품이 아니라면 이렇게 자아도취적인 작품은 도심의 공적 공간에서 빈번히 비난의 표적이 된다. 그 공간은 본질적으로 작가의 것이 아니라 시민의 것이기 때문이다. 청계천에 배치된 클레이스 올덴버그의 「스프링 Spring」(2006)이 빈번히 비난의 표적이 되는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반면 어떤 작가들은 그 공간에 속하는 한에서만 작품일 수 있는 작품을 제작한다. 이런 작품을 장소-특정적 미술(site-specific art)이라 부른다. 크리스토와 잔느 클로드 부부가 20년 이상을 준비해 1995년에 선보인 베를린 국회의사당 포장작업이 그 사례다. 이렇게 장소의 특수성을 고려하는 작가는 때로는 그 장소에 거역하고 또 때로는 순응하면서 장소와 긴밀히 소통하는 작품을 제시하고자 한다.

공적 영역의 컨텍스트로 향하는 눈길

어떤 경우든 우리는 공공장소에 배치된 작품을 해석할 때 그 장소성을 염두에 둘 것이다. 그 작품은 주변 공간에 잘 어울리는가, 또는 그 장소의 역사, 사회, 문화적 문맥과 부합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묻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그 장소가 사람들이 아주 많이 드나드는 공적 영역일 때 우리의 시선이 텍스트가 아니라 컨텍스트로 자꾸만 향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피한 일일 수도 있다.

버스터미널이나 기차역, 공항 같은 공간에 배치된 작품은 어떤가. 작가들은 어떤 생각, 어떤 심정으로 거기에 그런 작품을 설치했을까. 먼저 우리는 서울 강남의 고속버스터미널(센트럴 시티) 입구에 배치된 둥근 세 개의 구 형태가 나란히 모여 있는 커다란 설치 작품을 떠올려볼 수 있다. 불행히도 우리는 이 작품의 제작자나 제목, 설치시기를 알 수 없다. 여기에는 어떤 정보도 제시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둥근 구는 자족적이고 자유로운 형태지만, 바로 그 때문에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차단된 폐쇄적인 형태다. 그래서 그것은 좀처럼 외부와 어울려 소통할 수가 없다. 센트럴시티 앞에 있는 단단한 세 개의 구는 그렇게 자신들의 소우주를 형성하고 자족적으로 동시에 폐쇄적으로 거기에 있다. 그 소우주는 모든 것이 오고 가는, 그리고 출발과 도착이 공존하는 소통과 교류의 매개처로서 버스터미널의 이미지와 너무 심하게 어긋난다. 

인천 공항 접근로에 있는 「Flying to the future」(김무기, 2007. 이하 「플라잉」)를 보자. 공항 측에 따르면 이 작품은 “세계 최고 허브공항과 초일류 미래공항의 이미지를 자연의 에너지인 태양광과 빛, 바람으로 형상화해 유선형으로 표현한 조형물”이다. “만 개의 스테인레스로 만들어진 작은 비행선은 바람에 흔들리며 작은 소리와 호흡하는 듯 역동적인 모양을 만들어 내는데 이는 찬란하게 발전하는 인천국제공항을 상징한다”는 설명이 덧붙는다.

그러나 그 작은 소리를 듣기란 매우 힘들다. 이 작품은 공항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다가가려면 널찍한 공항 주차장을 가로지르고 횡단보도 없는 도로를 몇 차례 통과해야 한다. 이 작품을 보려면 3일 전에 예약하고 공항에 도착해서는 인솔자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 우리는 이 작품을 차창을 통해 순간적으로 접하게 될 것이다. 이런 사정을 감안한 듯 작가는 강렬하고 역동적인 이미지를 창출했다. 그 이미지는 먼저 내게 이륙하는 비행기로 보인다. 국제공항의 조형물에 부합하는 형태다. 그러나 기실 내게 그것은 비행기보다는 남근처럼 보인다. 그것은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배타적 공간 가운데 우뚝 서서 주변을 지배하며 큰 목소리로 웅변한다. Flying to the future!

박기원, 「자-넓이」, 2003. 서울역 앞에 설치된 이 작품은 주변에 순응하는 직각 형태로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공공조각과 마음의 지향성

서울역에는 「Flying to the future」와는 여러모로 성격을 달리하는 공공조각 작품이 있다. 규모에 있어서는 「플라잉」에 크게 뒤지지 않는 커다란 작품 임에도 이 작품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이 작품이 벌판에 세워진 「플라잉」과 달리 여러 높은 건물과 설치물 사이에 세워진 탓이기도 하지만 그 형태가 주변 건물 및 설치물의 형태에 순응하는 직각 형태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 작품은 박기원의 「자-넓이」(2003)다. 철판과 돌로 만든 직각 자 형태의 기하학적인 구조물이 하나는 누워있고 하나는 세워져 있는 형태다. 수평과 수직, 유색과 무색이 조율된 모양새다. 이로부터 우리는 기차여행이 함축하는 휴식과 운동, 들뜬 마음과 지친 마음의 공존을 헤아릴 수 있다. 사방을 향하는 우리 마음의 지향성을 읽을 수도 있을게다.

물론 이와 다른 시각에서 이 작품을 해석할 수도 있다. 예컨대 김준기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은 이 작품이 앉아서 쉴 수 있는 벤치기능을 겸하고 있는 스트리트 퍼니처라는 점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이 작품은 서울역에서 유일하게 노숙자들에게 편히 누워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이렇게 이 작품은 김준기 학예사의 표현을 빌면 “상징적인 차원에서 사회적 소수자에게 금지가 아닌 허용을 허락하는 공간”을 구현한다. 그러나 그 대가로 이 작품은 눈에 확 띄는 작품이 아니라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 작품이 됐다.  

  
우리가 장래에 기차역이나 터미널, 공항에 세울 작품들은 어떤 작품들이어야 할까. 「플라잉」처럼 영웅적인 형상일까, 아니면 「자-넓이」처럼 겸손한(?) 작품일까. 그러나 문제는 지금 우리 기차역, 터미널, 공항에는 볼만한 작품이 아직도 너무 적다는 데 있다. 때로는 출발하는 마음으로 또 때로는 도착하는 마음으로 잠시 작품에 시선을 고정시켜보자. 그리고 다시 한번 주변 공간을 둘러보자. 아마도 좋은 공공미술작품이란 그렇게 다시 둘러본 세계를 다른 세계로 바꿔 놓는 작품이 아닐까.

홍지석 객원기자 kunst75@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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