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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인물] 미국 클래식 재창조한 레너드 번스타인, “음악엔 좌우가 없다”
[역사 속의 인물] 미국 클래식 재창조한 레너드 번스타인, “음악엔 좌우가 없다”
  • 송주호 음악칼럼니스트
  • 승인 2010.10.11 1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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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 1918. 8. 25~1990. 10. 14)이라는 이름은 많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이미지로 각인돼있다. 아마도 대부분은 뉴욕 필하모닉의 지휘자로 기억할 듯하고, 뮤지컬 작곡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미국의 클래식 음악은 19세기만 하더라도 그리 수준이 높지 못했다. 재능 있는 미국 음악가들은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맥도웰은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며, 고초크는 남미 음악에 심취해 브라질에서 일생을 보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된 20세기에는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작곡가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에스파냐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했던 낸캐로우는 귀국하지 못하고 멕시코에 머물렀으며, 아이브즈는 보험 사업가로서 살면서 여가시간에나 작곡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때에 등장한 번스타인은 미국 음악의 희망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교육받은 음악가로서 명성을 얻은 첫 지휘자로, 보스턴 심포니의 지휘자였던 러시아 출신의 세르게이 쿠세비츠키와 번스타인 이전에 뉴욕 필하모닉의 지휘자였던 그리스 출신의 드미트리 미트로풀로스 등 당시 미국 음악계를 이끌던 유럽 출신의 거장들의 후원을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미국 최초로 말러의 교향곡 전곡을 연주하며 정통 유럽 클래식에 대한 식견을 보여주면서도 아론 코플란드와 윌리엄 슈만 등 동료 미국 작곡가의 작품들을 연주해 미국 음악계의 진정한 태양으로 떠올랐다.

작곡가로서의 번스타인은 다양한 모습을 보였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전쟁 중 잠시 뉴욕에 정박한 함선의 해군들이 24시간 동안 뉴욕을 돌아다니며 즐기는 내용의 ‘온 더 타운’이나 뒷골목의 불량 청소년 이야기를 다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등의 대중적인 뮤지컬이었다. 뮤지컬은 아니지만 다소 소란스러운 작품인 ‘미사’도 이러한 맥락에 있다.

작곡을 하는 연주자들은 보다 심각한(!) 클래식 작곡가로서 기억되기를 원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50대 초반에 베토벤은 그 나이에 수많은 걸작을 남겼지만 자신은 그렇지 못했다며 괴로워할 정도로 작곡가로서의 갈망이 컸다. 그런데 이러한 갈망의 결과물인 심각한 작품들은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반영돼있다.

24세 때에 작곡한 출세작 ‘교향곡 1번 예레미야’는 유대의 선율로 히브리어 성경의 예레미야 애가를 부르며, ‘교향곡 3번 카디쉬’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유대의 기도문인 ‘카디쉬’를 극적으로 재구성했다. ‘치체스터 시편’은 히브리어 성경의 시편을 가사로 한다. 유대인 지휘자로서도 이스라엘 필하모닉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많은 연주회와 레코딩을 남겼다.

이쯤 되면 번스타인이 유명한 동성연애자였다고 말씀하실 분이 계실 것 같다. 번스타인은 칠레 출신의 여배우인 펠리시아 몬테알레그레와 결혼하고 세 명의 자식을 두었다. 동성애자 자유운동에 고무된 그는 결국 이혼하고 동성 애인에게 떠나고 말았다. 번스타인은 그러나 아내가 폐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와 아내가 세상을 뜰 때까지 함께 했다.

그렇다면 정치적인 성향도 말해볼까. 그는 확고한 좌파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에 활동했던 흑인 무장운동단체인 흑표범당을 지지하고 그들을 위해 음악회를 열기도 했으며, 베트남 전쟁을 공개적으로 반대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을 했던 시기는 그가 뉴욕 필하모닉의 지휘자로서 최고의 명성을 누리던 때였다.

여기서 나는 번스타인이 음악 교육에 끼친 영향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1958년부터 15년이나 지속된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 TV 시리즈는 번스타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국내에서도 방영됐는데, 클래식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한번쯤은 봤을 것이다. 이와 함께 1973년, 그의 모교인 하버드대 강연문을 정리한 ‘대답 없는 질문’에서는 언어를 통해 음악을 이해하는 방법을 제시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나도 대학생 때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봤는데, 지금은 구할 수 없는 책이 돼 아쉽다.

멋모를 때, 조금씩 모았던 클래식 음반에서 ‘번스타인’이라는 이름을 봤던 것이 전부였지만, 서거 20주년을 맞아 그의 활동을 짧게나마 되돌아보면서 그가 끼친 영향을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만약 여러분이 미국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클래식 음악을 듣고 있다면, 그리고 자녀들을 위해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를 찾아간다면, 이것은 번스타인의 은덕을 입은 탓이다.

 

송주호 음악칼럼니스트

EBS 정보기술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음악칼럼니스트로서 <스트링앤보우>, <콰이어 앤 오르간>, 서울시향 월간지 <SPO> 등 클래식 음악잡지에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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