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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감각 개념의 중심은 ‘청각’ … 자의적 번역 아쉽다
근대적 감각 개념의 중심은 ‘청각’ … 자의적 번역 아쉽다
  • 구자현 영산대·과학사
  • 승인 2010.10.11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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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스턴 지음, 『청취의 과거-청각적 근대성의 기원들』(윤원화 옮김, 현실문화, 2010.8)

청각과 듣기에 관련한 좋은 책이 없는 국내 현실에서 『청취의 과거: 청각적 근대성의 기원들』(현실문화, 원제 The Audible Past: Cultural Origins of Sound Reproduction)이 번역돼 나온 것은 국내 독자의 갈증을 해소할 길이 열렸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다. 몇 년 전에 과학사 연구자들에 잘 알려진 MIT의 디브너 연구소에서 열린 음향학 워크숍에서 12명의 학자를 초청한 적이 있었다. 필자도 동양에서 유일하게 초청받았는데 거기에서 저자인 조너선 스턴을 만났다. 이 책은 필자가 관심을 갖고 있는 19세기 음향학사와 관련해 정독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만남은 내게 특별했지만 저자와 많은 대화를 할 시간이 없어 아쉬웠다. 저자는 음향 기술의 문화사적 측면을 폭넓게 연구해온 중견 학자이다.

이 책은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미국에서 음향 재생 기술(전화기, 축음기, 라디오 등)이 어떠한 사회문화적 함의를 갖는지를 집중적으로 논의한다. 저자는 음향 재생 기술의 탄생과 사회적 수용의 과정에서 사회문화적 요소의 기여를 치밀하게 밝혀내고 청취 테크닉이 어떻게 구성되고 음향 기술의 변용에 영향을 미쳤는가를 천착한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저자는 시각이 지배하고 있는 근대적인 감각 개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1장에서 저자는 전화기의 발명자인 벨이 만들었고 거기에서 전화기 발명의 단초를 얻었다는 포노토그래프에 논의를 집중한다. 인간의 귀를 부착해 소리에 따라 고막이 진동하는 양상을 기록하게 만들었던 포노토그래프는 고막형 장치가 왜 이후 전화기와 축음기의 기초를 이루게 됐는지를 보여준다.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자동기계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의 귀를 흉내 낸 장치가 이후 음향 재생 기계를 주도하게 됐는지를 생리학과 음향학의 발전 맥락에서 추적하면서 저자는 이러한 새로운 기계가 출현해 사람의 듣는 방식이 바뀌게 됐다는 기술결정론적 해석을 비판하고 사회문화적 토대가 구축된 가운데 이러한 발명품이 도출됐음을 주장한다. 다만 그러한 사회문화적 및 학문적 토대가 우선적으로 갖춰진 유럽에서 왜 이런 음향 기술이 먼저 출현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이 아쉽다.

2장과 3장에서는 근대적인 청취 테크닉이 의학적, 기술적 맥락에서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논의한다. 18세기에 프랑스의 의사 라에네크가 청진기를 발명하고 사람 몸 안의 소리를 들어서 병을 진단하는 기술을 발전시킨 과정으로부터 지식을 형성하는 청각적 실행이 어떻게 구체화됐는지를 살핀다. 또한 당초에 電信은 띠에 점과 선을 인쇄하는 시각적인 방식을 채택한 반면에 그것을 대체하게 된 음향 전신은 수신기에서 발생하는 소리를 듣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시각을 대신하게 된 청각이 보다 근대적인 기술이었음을 주목한다. 저자는 이후 본격적인 음향 재생 기술이 음향의 청취를 어떻게 ‘혼자서 함께’ 듣는 방식으로 바꾸어나갔는지 추적한다. 이러한 서술에서 초기 음향 재생 기술의 역사를 잘 모르는 독자들은 논의를 따라가는 데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영어권 맥락에서는 이러한 기술사 서적이 많아 일부러 중복된 논의를 피한 것이겠지만 우리나라의 맥락에서는 역주를 달아서 보완했으면 좋았을 부분이다.

4장의 논의는 기술의 변형 가능성에 초점이 맞춰지는데 음향 기술이 미디어로 변모하는 제도적· 사회적 과정을 살핀다. 기술적 측면에서 보면 오늘날 휴대전화는 무선통신이라는 점에서 전화라기보다는 라디오에 더 가까운데 우리가 그것을 전화로 부르는 이유는 상호 연관된 제도, 기술, 인간, 실행의 전체 집합 속에서 “필연적 관계가 없는 서로 다른 것들이 결합해 새로운 실체를 구성”하는 ‘절합(articulation)’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라디오는 오늘날 방송 매체이나 1920년대 이전에는 일대일 무선통신용이었고, 전화기는 오늘날 일대일 접속망이나 20세기 초에는 전화 방송이 인기를 끌었었고, 레코딩은 당초에 업무용으로 상업화됐으나 오락용으로 변모했다. 기술이 어떤 용도로 쓰일지는 사회적 맥락이 결정해 온 것이다.

5장에서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레코딩의 음향적 충실도라는 개념이 단순히 기술적 우수성을 뜻하지 않고 사회적 맥락에서 형성된 특수한 개념임을 보여준다. 당시 광고를 통해 원본과 재생된 소리가 똑같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음질이 떨어지는 재생음에 만족하도록 청취라는 실행을 훈련했음을 보여준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광고에 대한 수사적 담론 해석을 도모하나 실제로 이 당시 음향 기기들이 광고와 달리 음질이 얼마나 떨어졌는가에 대한 실증적 자료를 제시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현재 남아 있는 당시의 녹음 자료들은 녹음 매체나 재생 설비가 노화됐기 때문에 당시 재생 음질을 정확히 알 수 없는데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한 고려가 빠져 있다.

6장은 죽은 사람의 음성을 보존하는 차원에서 레코딩이 그 가치를 크게 인정받은 것이 19세기 말에 널리 퍼져 있었던 죽음의 문화 때문이라고 본다. 저자는 강신술의 유행, 새로운 시체 방부 기술, 죽은 주인의 음성을 축음기로 듣는 개의 그림 등의 사례를 통해 축음기를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죽음 문화의 산물로 본다. 죽음의 문화라는 문화적 맥락을 기술의 발전에 연결시키는 점에서 저자의 혜안이 남다르게 느껴지지만 레코딩 기술의 소비자들이 실제로 죽음의 문화 때문에 소비자가 됐다는 직접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이 문제이다.

몇 가지 약점에도 불구하고 폭넓은 식견을 바탕으로 청취의 역사를 잘 서술해준 이 책을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다만 번역본에서 여러 문장이 의역을 넘어 오역되는 사례가 많아서 아쉬움이 있다. ‘hearing’과 ‘listening’을 각각 ‘청각’과 ‘청취’로 번역한 데에서 생기는 오독은 그나마 역자의 고심이 느껴지는 부분이나 가령, 11쪽에서 원문의 “Through techniques of listening, people harnessed, modified, and shaped their powers of auditory perception in the service of rationality.”를 “이렇게 재구성된 청각적 지각 능력은 청취의 테크닉을 통해 합리성의 수단으로 발돋움했다”로 번역하고 그 다음 문장인 “In the modern age, sound and hearing were reconceptualized, objected, imitated, transformed, reproduced, commodified, mass-produced, and industrialized.”는 누락시킨 것은 무성의하게 느껴진다. 이런 사례가 도처에 널리 있으니 역자가 ‘번안’한 조너선 스턴을 한국 독자들이 만나게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구자현 영산대·과학사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국인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레일리에 대한 연구공로를 인정받아 2009년에 플라톤 상(Plato Award)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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