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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② 남발되는 명예박사
[연중기획] ② 남발되는 명예박사
  • 교수신문
  • 승인 2002.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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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는 간 데 없고 셈만 남은 상아탑
대학들이 정·재계 인사들과 인연을 맺거나 기부금을 받기 위해 무분별하게 명예박사학위를 남발, 이를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교육통계 연보에 따르면, 2001년도까지 수여된 명예박사학위만 해도 총 2천5백30개에 달했다. 1992년에 33개가 수여되던 명예박사학위가 2001년도에는 무려 1백37개가 수여된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지난 10년간 명예박사학위를 가장 많이 준 상위 30개 대학을 조사한 결과, 명예박사학위의 34.4%가 정·재계 인사들에게 수여된 것으로 나타났다. <교수신문 225호 참조>남발 막을 제동장치가 없다

특히 기부금을 낸 재계인사들과 정권을 잡은 실세들에게 상당수의 학위가 수여돼, 대학들이 학위의 학문적 권위와 명예를 지키기보다는 기부금 및 행정적 지원에 대한 기대에 눈이 멀어 대학 본연의 역할과 기능을 망각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시됐다..

서울 소재 대학에서 대학원장을 역임한 김 아무개 교수는 “사회적으로 크게 기여하지 않았어도 박사학위가 없는 돈 많은 경영인이 ‘명예박사학위를 주면 학교에 10억원 이상을 기탁하겠다’는 등의 제안을 하면 거의 대부분 명예박사학위를 준다. 공식적·비공식적으로 받은 기부금은 학교 발전에 사용하게 된다. 명예박사학위와 기부금을 교환하는 것이다. 교육부의 통제가 필요할 만큼 학위가 가볍게 교환되고 있다”며 돈과 학위의 거래가 실제적으로 이뤄지고 있음을 내비췄다. 또한 김 교수는 “지자체 단체장들로부터 은근한 제의가 들어올 때도 많다. ‘학교의 진입로가 정비가 잘 안 돼 있는데, 군·시 차원에서 행정적인 지원을 고려하고 있다’는 등의 말들이 오가면 학교에서는 알아서 명예박사학위를 선사하기도 한다”고 말해 명예박사학위가 정계로부터의 행정적 특혜를 얻기 위한 주된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점을 암시했다.

그러나 문제는 대학들의 학위를 매개로 한 부도덕한 교환에 적절하게 제동을 걸 수 있는 견제책이 딱히 없다는 점이다. 대개 총장 및 이사장이 거론한 인사에 대해 대학원장이 대학원위원회를 소집해 학위 수여 여부를 결정하는데, 총장과 이사장의 견해에 반대하는 경우도 드물 뿐 아니라 해당학과 교수들의 의견을 묻는 절차도 생략되기 때문이다.

전남 소재 대학에서 대학원장을 역임한 서 아무개 교수는 “발전기금이나 장학기금을 내거나 낼 분들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한다. 예술가들에게는 문화적 유산이 될 수 있는 작품을 받기도 한다”라면서 “또한 대학은 정부 및 지역사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협조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라도 명예박사학위를 주는 것이 관행이다. 이것은 어느 대학이나 마찬가지라고 본다”며 명예박사학위 남발의 불가피론을 제시했다.

명예로운 인사들에게 수여됨으로써 대학의 위상을 높이는 데 쓰여지기보다는, 영향력 있는 인사를 위한 ‘공물’ 혹은 대학의 재정 확보를 위한 ‘도구’로 전락한 명예박사학위의 실추된 위상과 역할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다.

명예박사학위와 기부금 그리고 권력과의 친근성은 무수한 사례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C재단의 L이사장은 제주대에 10억을 기증해 명예박사학위(1999)를 받았으며, M기업의 K회장은 전남대에 3억원을 기탁해 명예농학박사학위(1999)를, L그룹의 K회장은 연세대에 70억원을 기증해 명예경영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S그룹의 L회장은 서울대에서 명예경영학박사(2000)를 받은 후 80억원을 기증해 의혹을 샀다.

건전한 기부금 오히려 줄어들 수도

부임한 이후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지자체 단체장들의 목록도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심재덕 수원시장은 경기대와 명지대(1999)에서, 김혁규 경남도지사는 경상대와 동아대(2000)에서, 문희갑 대구시장은 계명대(2001)에서, 안상영 부산시장은 부산대(2000)에서, 이상조 밀양시장은 부경대(2001)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더군다나 웬만한 정·재계 인사들에게 명예박사학위가 수여되다보니, 권노갑 전 의원, 김봉호 의원, 최순영 전 신동아 그룹 회장 등 그동안 정·경 유착형 부정부패 비리 사건들에 연루된 정·재계 인사들 중 명예박사학위를 받지 않은 이가 없어 명예박사학위가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있는 실정이다.

정우현 아주대 교수(교육대학원장)는 “명예박사학위는 각 학교가 명예를 걸고 수여하는 학위다. 학위가 정치적으로 이용되거나, 재정 확보를 위한 수단이 되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해당 학교의 학문적·도덕적 수준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며, “학위에 관한 한 교육부가 대학에 자율을 준 만큼, 학위의 위상과 권위를 둘러싼 모든 책임은 대학이 져야 할 것이다”라고 충고했다.

학문의 진리를 추구하는 대학이 근시안적인 시각으로 당장의 이익을 위해 학위를 무분별하게 수여하는 것은 결국 대학이 스스로를 부정하는 꼴밖에 안 된다는 지적이다.

또한 명예박사학위의 수여가 손쉬운 재정 확보의 한 방안이 될 수 있겠지만, 거시적인 안목에서 볼 때, 오히려 재정 확보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주장도 일관되게 제기되고 있다. 황한식 부산대 교수(경제학과)는 “돈과 줄을 학교로 끌어들이기 위해 명예박사학위를 남발하고 있는데, 그런 식으로 학교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큰 시각으로 봤을 때 오히려 해가 된다”며 한번 실추된 대학의 위상과 권위는 되돌이키기 어렵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편 오세철 연세대 교수(경영학부)는 “학과 교수들과 진지한 의논도 없이 결정이 되는 것이 그 자체로 문제일 뿐 아니라, 제동을 걸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아무 것도 없으니 당연히 남발될 수 없다”며 명예박사학위 수여 과정상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허영수 기자 ysheo@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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