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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인물] ‘조선적 생물학자’ 석주명
[역사 속의 인물] ‘조선적 생물학자’ 석주명
  • 교수신문
  • 승인 2010.10.04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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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명
몇 년 전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던 한 과학자가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경구를 즐겨 인용한 적이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해방직후에 한 생물학자가 생물학은 다른 과학 분야와 달리 향토색이 짙어서 ‘조선적 생물학’이라는 국적 있는 과학이 가능함을 주장했다. 10월 6일로 타계한지 60주년이 되는 석주명(1908~1950)이 바로 그같은 독특한 科學觀을 지녔던 생물학자였다.

평양에서 태어난 석주명은 일본의 가고시마고농을 졸업하고 1931년부터 모교인 송도고보의 박물교사로 근무하면서 조선산 나비에 대한 분류학 연구를 수행했다. 그는 20여년의 연구생활 동안 무려 75만 개체에 이르는 표본을 조사해 개체변이의 정규분포곡선을 작성하고 그 범위에 포함된 800여개의 기존 학명들을 同種異名으로 판명해 학계에서 퇴출시켰다.

통계학적 방법을 생물분류학에 본격적으로 적용시킨 논의는 서구 학계에서도 1930년대 후반부터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에 석주명의 연구는 단순했지만 매우 독창적인 것이었다. 그는 1940년 조선산 나비에 대한 연구를 총정리한 『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를 펴냈는데,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과학자가 영문으로 펴낸 유일한 연구서였다. 대학을 졸업하지도 않은 고보 교사가 제국대 교수 등 저명한 학자들의 잘못된 연구를 지적하고 바로잡음으로써 석주명은 ‘나비박사’라는 별명과 함께 암울했던 시절 우리 민족의 과학적 우수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과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스스로를 ‘조선적 생물학자’로 여긴 석주명은 자신의 연구대상을 철저하게 조선의 나비로 한정했다. 고전문헌에서 나비와 관련된 기사나 인물을 발굴해 소개하는 등 자연뿐 아니라 역사 속의 나비도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1930년대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 추진됐던 ‘조선학 운동’에 큰 관심을 보였고, 그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생물학 연구도 그 흐름에 놓고자 했던 것이다.

그 동안 과학사 분야에서 석주명의 나비분류학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규명해왔는데, 최근에는 ‘제주학’의 선구자로 크게 주목받고 있다. 석주명은 나비채집을 위해 전국 각지를 다니면서 각 지역의 방언이나 독특한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됐다. 특히 제주도에서 2년간 머물면서 방언, 문헌, 곤충상 등 6권에 이르는 제주도 총서를 집필했다. 한국인이 집필한 최초의 방언집인 『제주도 방언집』은 국어학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제주도의 생명조사서: 제주도 인구론』은 16개 마을의 인구동태를 다룬 것으로, 제주도에 관한 최초의 사회·인류학적 연구로 인정받고 있다.

아직 지역연구라는 개념이 자리잡기 전이었지만 석주명은 자신의 관심을 ‘제주도학’으로 명명했다. 이처럼 한 개인이 특정 지역의 자연, 인문, 사회를 망라한 총서를 간행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또한 석주명은 국제어 에스페란토 교과서를 집필했는데, 그에게 에스페란토는 식민지라는 한계를 넘을 수 있는 평화의 언어였으며, 많은 한국의 에스페란티스토들은 그를 초창기 한국에스페란토 운동을 이끈 선구자로 평가한다.

통섭이나 융복합이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는 요즘 탁월한 나비학자이면서 인문사회과학까지 아우르는 통합적 학문을 추구했던 석주명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진정한 ‘博物’학자였던 그의 삶과 학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지향했던 것처럼 종합적인 접근이 필수적이고, 이는 우리 학문의 길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문만용 전북대·과학사 

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를 했다. 주요 논문으로 「’조선적 생물학자’ 석주명의 나비분류학」, 「1960년대 과학기술 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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