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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교차로에 세워진 메타포...시간은 슬픔으로만 채워지지 않는다
삶과 죽음의 교차로에 세워진 메타포...시간은 슬픔으로만 채워지지 않는다
  • 홍지석 객원기자·미술평론가
  • 승인 2010.09.13 15: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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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지의 미술] ① 삶과 죽음: 병원에 배치된 공공조각

공공조각, 또는 환경조각의 의미작용은 장소의 공간적-시간적 성격과 깊은 관계를 지닌다. 여기 특별한 공간적 의미를 갖는 장소들이 있다. 서로 모순되는, 그러나 하나는 다른 하나를 전제로 하는 두 가지 특성이 공존하는 장소들 말이다. 예를 들어 (종합)병원에는 삶이 있고 또한 죽음이 있다. 또한 기차역에는 출발과 도착이 공존한다. 역사적 기억을 간직한 공간은 또한 현재적 삶이 영위되는 공간이다. 그런가하면 대학은 관념과 현실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이러한 특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장소가 바로 교차로다. 그렇다면 ‘교차로’로 대표되는 양가적 공간에 세워진 조각은 그 양가적, 이중적 특성들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이러한 조각의 양태를 고찰해보는 일은 모순적인 것들, 일견 대립되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을 함께 아우를 수밖에 없는 우리 삶의 존재 방식을 성찰하는 하나의 방식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경계지의 미술’은 교차로(경계지대)에 세워진 우리 공공(환경)조각을 본격 조망해보고자 한다.
때때로 우리는 한쪽 극단으로 치우쳐 다른 하나를 방기하는 조각, 두 가지를 모두 아우르고자 시도했으나 실패한 조각들을 확인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대립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킨 조각들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공공 조각의 특성상 우리는 그러한 양태를 그와 연관된 역사-사회적 문맥에서 해석할 수 있다. ‘경계지의 미술’은 다음 다섯 가지 주제로 현장의 양태들을 관찰하고 성찰하고자 한다.
         

글 싣는 차례

① 삶과 죽음 : 병원에 배치된 공공조각 
② 출발과 도착  : 역과 터미널, 공항에 배치된 공공조각 
③ 과거와 현재 : 역사적 장소에 배치된 공공조각  
④ 성숙과 미성숙 : 대학에 배치된 공공조각    
⑤ 길과 길 : 교차로에 배치된 공공조각
   

 

이수홍, 「자연으로부터」, 2009.
병원, 특히 종합병원에는 다양한 삶의 양태가 공존한다. 때때로 우리는 여기서 새 생명의 탄생을 숨죽이며 기다리고, 또 때로는 몸과 마음의 고통을 덜어줄 따뜻한 손길을 염원한다.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늦은 밤 장례식을 찾기도 한다. 이렇게 종합병원은 말 그대로 희노애락이 공존, 교차하는 장소다. 이런 장소에 부합하는 미술작품이란 무엇일까. 특히 병원 입구나 광장에 배치되는 조각은 각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병원을 찾는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기 때문이다. 우울한 마음을 위로해주는 밝고 명랑한 작품은 어떨까. 하지만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직면해 비탄에 잠긴 사람을 생각한다면 지나치게 밝고 명랑한 작품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생명의 탄생을 축복하는 작품도 생각할 수 있지만 죽음을 애도하는 작품도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종합병원 입구나 광장에 배치되는 많은 미술작품들은 명시적이고 직설적인 방식보다는 함축적, 은유적인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어쩌면 종합병원은 추상미술이 가장 잘 어울리는 장소일지 모른다.

 

함축적이고 은유적인 메시지 전달

신한철, 「하늘나무」, 2008.
조달청 맞은 편 강남 성모병원 입구에 설치된 이수홍의 「자연으로부터」(2009)는 퍽 흥미로운 작품이다. 여러 종류의 근원적 대립을 아우르고 있기 때문. 이 작품에는 부드러운 이어짐과 날카로운 갈라짐, 부풀어 오름과 움푹 들어감, 곡선과 직선, 명과 암, 자연재료인 돌과 인공재료인 금속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여기서 대립되는 것들의 공존은 충돌이 아니라 일종의 원만한 교류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이 작품은 병원을 찾는 우리 모두의 소망과 바람을 체현한다. 이것은 1990년대 초부터 ‘안과 밖-그 사이’라는 명제에 천착해 온 이수홍의 일관된 작품 경향이기도 하다. 평론가 안소연의 말대로 우리는 이 작가가 제시하는 이질적인 두 요소(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의 병렬 혹은 중첩으로부터 그 사이를 오가는 관계의 끈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다. 시간을 내어 작품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조각이 회화와 다른 것은 앞과 뒤, 가까이 있음과 멀리 있음의 관계 외에 둘러싸여 있음, 감싸고 있음의 관계를 구현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병마와 싸우는 환자의 고투를 응원하는 우리의 마음이 그러할 것이다. 나는 지금 그의 앞, 그의 옆에 없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 마음은 그를 감싸고, 응원하고 있다.

현대아산병원 동관 입구 건너편 작은 공원에 설치된 신한철의 「하늘나무」(2008)를 보자. 이 작품은 작은 원들을 중첩, 조합해 수직의 상승성을 배가시킨 작품이다. 작가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이 작품은 “생명의 에너지를 상징하는 나무와 어둠으로부터의 회복, 그리고 미래를 밝게 비추는 불꽃의 이미지를 형상화”했다. 반 고흐의 삼나무가 그렇듯 이 작품은 고통받는 자의 상승, 또는 초월의 의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내게 그 수직은 너무 날카로워 보인다. 그것은 상승, 초월을 배타적으로 강제하고 강요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무의 수직성은 그 수평성과 어울림으로 인해 비로소 아름답다. 촛불의 타오름은 녹아 흐르는 초의 소멸을 수반한다. 수직을 지탱하는 수평, 상승하는 힘에 수반하는 하강하는 힘에 대한 헤아림의 부재가 나로서는 몹시 아쉽다.       

최재은, 「시간의 방향」, 1994.
장식품이 아니라 ‘권능회복’의 공간예술

삼성 서울병원 장례식장 입구 광장에는 최재은의 「시간의 방향」(2004)이 배치돼 있다. 큰 원반 형태의 움푹 파인 공간의 중심에 물방울 형태의 입체를 약간 기울여 설치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아마도 국내 종합병원에 설치된 조각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일 것이다. 그 크기도 크기려니와 장례식장 전체를 압도하는 짙고 깊은 파랑색이 그곳을 찾는 모든 이의 눈길을 잡아끌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해시계를 닮았다. 그래서 슬픔에 젖은 사람들이 잠시나마 시간과 삶의 의미를 반추할 계기를 제공한다. 급하다고도 원만하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애매하게 기울여놓은 추의 아슬아슬한 형태는 매 순간 아슬아슬한 선택의 기로에 섰던 우리 삶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고 삶과 죽음 사이에서 유동하는 인간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을게다. 또 많은 사람들이 그 물방울 형태의 이미지에서 ‘눈물’의 이미지를 발견한다. 
병원에 설치된 미술작품은 차갑고 냉정한 병원 분위기에 보다 인간적인 온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 이질적인 것을 적절히 조율해 균형감을 갖춘 조각 작품은 심리적으로 위축된 환자와 환자의 가족들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병원 진료진에게는 환자들에 대한 애정과 일에 대한 사명감을 불어 넣어줄 수 있다. 그럼으로써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미술작품은 미술평론가 박삼철이 지적한대로 모두가 존중받는 권능회복(empowerment)의 장을 펼쳐놓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병원 미술작품 앞에서 잠시나마 휴식의 순간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서 작품은 그저 미술장식품에 머물지 않는다. 작품은 병원의 가장 중요한 기능, 곧 치유와 위무를 위한 중요한 도구요 수단이다. 그래서 그것은 병원이라는 공간의 가장 중요한 일부로서 인식되고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 
더운 늦여름 오후, 거세게 내리던 소나기가 그치고 어두운 구름 사이로 다시 햇살이 비친다. 최재은의 작품 주변을 맴돌며 나는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모든 아픈 사람들이 완쾌되기를, 모든 태어난 이들이 행복하기를, 모든 죽은 이들이 편안히 영면하기를. 

홍지석 객원기자·미술평론가 kunst75@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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