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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인물] 선비됨의 정신과 지조, 梅泉 黃玹
[역사 속의 인물] 선비됨의 정신과 지조, 梅泉 黃玹
  • 정선용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 승인 2010.09.06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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梅泉 黃玹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인 1910년 9월 10일, 야윈 얼굴에 수염을 짧게 기른, 동그란 뿔테 안경을 써서 꼬장꼬장해 보이는 한 선비가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선비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를 집어삼키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일제는 1910년 8월 29일에 이완용 등 친일파를 끌어들여 합병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겨우 명맥만 유지해 오던 대한제국은 완전히 망하게 됐다. 전라도 구례에 살던 그 선비는 며칠이 지난 뒤에야 이 소식을 겨우 들을 수 있었다.
소식을 들은 선비는 붓을 들어서 유서를 썼다.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나라를 위해 죽는 사람이 없다면, 어찌 통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유서를 다 쓴 선비는 조용히 눈을 감은 채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그 선비는 누구였나. 바로 매천 황현이었다.


매천은 1855년 12월 11일 전라도 광양의 서석마을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과거시험을 통해 발신해 자신의 뜻을 펴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이내 뜻을 접었다. 그리고는 평생 광양과 구례에 묻혀서 지냈다. 학문에 침잠해 자기 자신을 수양하고, 학교를 설립해 후진을 양성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그러다가 56세가 되던 해인 1910년에 나라가 망하자 독약을 마시고 自靖殉國했다.

매천은 어떤 인물이었나. 문학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은 매천에 대해 ‘조선 왕조 최후의 대표적 시인이자 문장가’라고 평한다. 유학에 대해 논하는 사람들은 ‘성리학 위주의 유학사상에서 벗어나 실학이나 서양의 학문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진 유학자’라고 평한다.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매천야록』 등을 지은 것을 들어 역사가라고 평한다. 독립운동에 대해서 연구하는 사람들은 庚戌國恥에 독약을 마시고 자결한 것을 들어 우국지사라고 평한다.

매천은 순국하기 전 絶命詩 네 수를 남겼다. 그 중 한 시에서 “새와 짐승 흐느끼고 산과 바다 찌푸리니, 무궁화 꽃 우리나라 이제는 다 망하였네. 가을 등불 아래에서 책을 덮고 회고하매, 이 세상서 식자 노릇 잘하기란 어렵구나(鳥獸哀鳴海岳嚬 槿花世界已沈淪 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라고 했다.

이 시의 마지막에 나오는 ‘이 세상서 식자 노릇 잘하기란 어렵구나’라는 구절이 내 가슴을 찌른다. 요즘 세태를 보면 어떠한가. 인사청문회장에서는 죄송하다느니, 반성한다느니 하는 말들이 난무한다. 그러면서도 어느 한 사람 시원스럽게 물러나지는 않고 시켜만 주면 잘하겠다고 한다.

또 매천이 말한 識者, 즉 오늘날 지식인들의 행태는 어떤가. 모두들 자신의 이익을 찾기에만 골몰한 채 사회적인 책임은 나 몰라라 하고 있다. 그럼, 또 이렇게 말하는 나 자신은 어떠한가. 되돌아보면 부끄러운 일 뿐이다. 우리 모두는 매천을 보기에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가치관이 제대로 정립돼 있지 않은 때에 소위 식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가슴 속에 새겨둬야 할 것이다.

정선용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성균관대에서 석사를 하고, 한국고전번역원 국역연수원에서 한문을 수학했다. 역서로 『조선왕조실록』과 『해동역사』, 『잠곡집』, 『향산집』 등 70여 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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