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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신과 기독교 정신의 깊고 순수한 만남 … 구원에 관한 새로운 해석 제시했다
한국 정신과 기독교 정신의 깊고 순수한 만남 … 구원에 관한 새로운 해석 제시했다
  • 박재순 씨알재단 연구소장·신학
  • 승인 2010.08.31 16: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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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의 종교사상, 어떻게 볼 수 있나

한국 현대사는 동서문명의 만남과 민주화 과정으로 전개됐다. 조선왕조가 쇠퇴하고 몰락하면서 지배 권력과 이념이 약화됐을 때, 민중이 역사의 중심과 선봉에 서게 됐고, 서구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서구로부터 기독교 신앙, 과학사상, 민주정신을 받아들임으로써 오랜 역사 속에서 잠들어 있던 민중의 자각이 이뤄지고 민주화 운동이 줄기차게 펼쳐졌다.

민중의 자각과 민족의 독립을 추구한 안창호와 이승훈이 주도한 신민회, 오산학교, 삼일독립운동의 정신과 역사를 이은 함석헌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현대사를 살았다. 현대사의 중심을 살았던 함석헌은 동양, 한국의 정신문화적 주체성을 가지고 서구의 정신문화, 기독교, 이성철학, 민주정신을 깊이 받아들였다. 유불도와 기독교를 회통한 유영모의 심오한 정신과 철학을 계승한 함석헌의 정신과 사상 속에서 동서정신문화의 창조적 만남과 융합이 이뤄졌고, 민주정신이 확립됐다. 함석헌은 제국주의와 민족국가주의를 극복한 민주정신과 세계평화정신을 씨알 철학으로 다듬어냈다.

함석헌의 심오하고 방대한 정신과 사상의 세계는 그의 주저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기틀이 잡혔다. 30대 초반의 함석헌이 이 책을 구상하면서 ‘루비콘 강을 건넜다’, ‘아무도 밟아보지 못한’(前人未踏) 세계로 들어간다고 스스로 말했을 만큼 이 책은 혁신적이고 모험적인 사유와 인문학적 상상력을 담고 있다.

이 책에서 함석헌은 고난을 통해 세상에 구원을 가져오는‘예수의 십자가’, 구원의 원리를 한민족의 고난의 역사에 적용했다. 한민족의 고난과 예수의 십자가 고난을 동일시함으로써 예수(의 십자가)는 성서와 기독교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한국역사 속으로 들어오게 됐고 한국 역사는 영적 깊이와 세계적 보편성을 지니게 됐다. 고난 받는 한민족이 예수의 자리에 섬으로써 자신의 구원뿐 아니라 세계의 구원과 평화를 가져올 주체가 됐다.

예수의 구원 원리 한민족에 적용

이 책에서 제기된 신학적 문제는 한국인이 예수와 기독교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한 가지 문제로 압축된다. 함석헌은 예수를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첫째 주체적으로 받아들였다. 함석헌에게 예수는 단순히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예수는 우리의 삶과 역사 속에 살아 있어야 할 주체이며, 우리는 예수의 생명과 정신, 뜻과 일을 이어서 우리의 삶을 완성할 책임을 가진 주체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처럼 십자가를 짐으로써 구원을 이뤄야 한다.

이것은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인 속죄론 즉, 예수의 피로 죄를 씻어 구원에 이른다는 가르침에 대한 전면 도전이고 새로운 해석이다. 그는 예수와 하나 되는 체험에 이를 때만 속죄가 일어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함석헌에게 인간은 예수와 신의 뜻과 생명을 따라 사는 존재이며 민족, 인류 그리고 우주 생명 전체의 님인 하나님을 대표해서 사는 존재이다. 함석헌의 속죄론은 개인의 주체의 자리에서 보면 自贖的 속죄론이고 전체의 자리에서 보면 代贖的 속죄론이다.

둘째 함석헌은 동양정신과 문화 즉, 유불도와 한국정신의 바탕에서 예수를 받아들였다. 함석헌에게서 예수와 한국인, 한국정신과 기독교 정신이 깊고 순수한 형태로 만났다. 함석헌의 민족사와 예수의 민족사가 민족과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그리고 종교와 경전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생동하는 주체로서 서로 합류하고 소통한 것이다. ‘큰 하나’를 지향하는 한국의 ‘한’ 정신에 비춰 예수는 ‘한[큰 전체] 생명의 님’으로 받아들여졌다. 예수가 자기를 부정하고 고난 받고 죽은 ‘십자가’는 우리가 죽고 ‘새로 나는’ 자리면서 ‘함 없이 하는’ ‘빔’과 ‘없음’의 자리였다. 뭇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이끈 십자가의 길은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이끄는 中道였다. 또한 한국정신과 동양경전은 서구정신문화, 기독교, 이성철학, 민주정신에 비춰 새롭게 해석됐다. 원만하고 포용적인 한국정신이 진취적이고 비판적인 예언자정신과 결합됐다.

동서고금의 정신과 사상 회통하고 종합

일본제국의 식민통치 속에서 민중과 함께 고난을 겪었던 함석헌은 2천 년 전 로마제국의 식민지배 속에서 민중과 함께 세계평화의 길을 열었던 예수의 하나님 나라운동을 재발견하고 계승했다. 함석헌은 한국의 주류 기독교로부터 이단으로 취급받고 외면당했지만 누구보다 예수에게 충실하고 예수와 가깝게 산 인물이었다. 함석헌은 한국 기독교와 2천 년 서구 기독교 정신사를 거슬러 민중 예수를 발견하고 그 예수를 오늘 우리의 삶과 역사, 정신과 문화 속에 살아 있게 했다. 이로써 함석헌은 기독교의 교리적 근본주의를 깨트렸고, 교회의 막힌 벽을 허물었으며, 신과 역사 앞에서 인간의 영적 자각을 촉구했고, 지배 권력과 이념에서 벗어나 민중사관을 확립했다.

식민지 백성으로서 민중의 고난을 함께 겪으면서 민중의 마음과 자리에서 그리고 예수의 관점에서 봤기 때문에 함석헌은 지배 권력과 지식인 엘리트의 독단에서 벗어나 인생과 사회와 역사를 크고 깊게 볼 수 있었다. 그에 따르면 세계역사는 전쟁과 폭력이 지배한 민족국가 문명시대에서 상생 평화의 원리가 이끄는 세계평화 문명시대로 바뀌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래 세계는 하나로 되는 길목에 들어섰다. 함석헌은 외세와 민족분단과 군사독재의 억압과 폭력 속에서 민주화와 비폭력 평화 운동을 펼쳤고, 국가와 민족의 벽을 넘어서 세계평화의 사명과 비전을 제시했다.

 함석헌은 서구중심의 문화적 우월주의를 극복하고 동서를 아우르는 민주적이고 세계평화적인 사상과 정신을 제시했다. 그는 참으로 동서고금의 정신과 사상을 회통하고 종합한 큰 사상가이다. 서구 근대철학과 민주정신이 고난 받는 민중의 역사 속에서 그리고 고난 받는 민중의 심정 속에서 정화되고 순화돼 함석헌의 정신과 사상 속에 합류됐다. 동서고금의 서로 다른 정신과 사상이 보물을 품은 큰 광맥처럼,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과 정신의 거대한 화산맥처럼 그의 글 속에 묻혀 있다.

박재순 씨알재단 연구소장·신학

필자는 한신대에서 박사를 했다. 주요 논문으로는 「동아시아와 함석헌의 평화사상」, 「함석헌의 문학관」, 저서로는 『씨알사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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