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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곳에서 길을 잃고헤매지도 못한다네
우리는 이곳에서 길을 잃고헤매지도 못한다네
  • 홍지석 객원기자·미술평론가
  • 승인 2010.08.23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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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의 미학_ <6>민경숙·최진욱과 이신조 또는 이혜경의 ‘서울’

日新又日新이란 말은 본래 인간에게 요구되는 덕목이지만 오늘날 그것은 대도시 서울의 덕목이다. 날마다 과거의 것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등장한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등장한 것들이 모든 것을 바꿔버린다. 부분의 작은 변화는 항상 전체의 변화를 가져오기 마련. 그렇게 서울은 항상 변한다. 이렇게 날마다 변하는 대도시 서울 속에서 안락함과 편안함을 느끼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서울이 고향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아니 더할 것이다.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난 소설가 이신조는 이렇게 말한다.

민경숙 「시도」, 나무판에 혼합재료, 204×207cm, 1992

“타향살이를 하는 사람들에게 생경함과 매정함으로 제 존재를 증명하는 이 도시가 그렇다고 제가 고향인 사람들을 푸근하고 넉넉하게 받아주고 감싸주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라는 것을. 이 도시가 고향인 우리는 당신들처럼 이 도시에 맘껏 푸념을 하거나 날 것 그대로의 울분을 터뜨리지 못한다. 고향인 탓에 완전히 길을 잃고 헤매지도 못한다. 도망칠 곳도 돌아갈 곳도 마땅치 않다. 이 도시는 그런 곳이다. 많은 것들이 자꾸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으려 한다.”(이신조 「조금밖에 남아있지 않은」, 작가글에서)

확신할 수 없음 또는 어떤 착시감

이신조가 묘사하는 상황을 볼록렌즈에 걸려든 누군가를 그린 민경숙의 작품(위 작품 ①)에 빗댈 수 있을지 모른다. 그 누군가란 작가 자신이다. 언제가 민경숙은 자신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요 며칠 난 마치 밀실공포증에 걸린 좀머 아저씨처럼 조금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바깥으로 바깥으로 쑤시고 다닌다. 불안과 강박을 안고. 그래봤자 이 서울 땅에서 내가 가는 곳은 정해져 있지만.”

평론가 박영택에 따르면 이 작가는 “아침에 들어와 저녁까지 꼬박, 작고 밀폐된 감옥 같은 작업실에서 그렇게 우울한 자화상만을” 오래도록 그렸다. 역시 서울이 고향인 소설가 편혜영의 표현을 빌면 서울은 ‘불안하고 초조하고 어수선’하다. 하지만 서울이 고향인 작가들에게 이 도시를 영영 떠나기를 꿈꾸는 일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편혜영을 다시 인용하면 서울은 “나와 가장 닮은 도시”이기 때문이다. 

서울처럼 불안하고 초조하고 어수선한 작가들은 자신이 보고 듣고 만지는 것을 좀처럼 확신할 수 없다. 그것이 가짜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럴싸한 가짜 이미지를 동경하면서 막상 그것이 눈앞에 있을 때에는 의심한다. 가령 소설가 이혜경이 쓴 단편 「북촌」의 한 구절은 이렇다.

“이 집은 …… 꼭 드라마에 나오는 집 같네요. 아침이면 커다란 밥상에 온 식구가 둘러앉아 밥먹는 집 말예요. 무슨 국 제일 좋아하세요? 미역국? 콩나물국? 무국?” 여자는 내일이라도 이 집 부엌에 차고 들어 날마다 국을 끓여낼 우렁각시라도 되는 듯이 물었다. 여자의 볼에 돋은 솜털이 햇살 받아 하르르, 금빛으로 빛났다. 그 금빛 털에 손을 뻗치는 순간, 시간이 정지되고 그와 여자가 그대로 화석이 되어버리는.”(이혜경, 「북촌」에서) 

이렇게 현실과 드라마, 생생한 것과 화석이 돼버린 것을 함께 감각하는 작가들이 구현한 서울의 리얼리티는 항상 복합적이다. 화가 최진욱이 1991년에 묘사한 서울 풍경을 보자(아래 작품 ②). 이 작품에서 우리는 홍은동 개천변을 나란히 걸어오고 있는 두 명의 꼬마들과 텅 빈 도로를 휑하니 스쳐가는 자동차를 본다. 구름이 낮게 깔린 어느 여름날 오후의 한 순간이다. 이 장면을 평론가 심광현은 “시간이 지나가도 결코 소멸됨 없이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한낮의 평화스러운 시정”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곧 심광현은 녹색과 회색 계통의 차가운 한색이 주조를 이루지만 햇빛이 넘쳐흐르는 따스함이 한데 뒤섞인 이 그림의 복합적인 양상에 주목한다. 게다가 그는 여기서 “크고 작은 붓길 사이로 언뜻언뜻 엿보이는 캔버스의 빈틈들이 그 부드러운 공기의 밀도 사이에 일종의 바람구멍과 같은 효과를 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그에게 “마치 손에 잡힐 듯한 물질적인 느낌을 주면서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져”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서울의 ‘불안하고 초조하고 어수선한’ 리얼리티를 구현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서울은 작가와 아주 닮았다.

리얼리티에 대한 문제의식의 변주

서울의 리얼리티에 대한 문제의식은 이제 “평범하고, 무미건조하며, 전통적이고, 답답한 동시에 가상적인” 자신의 ‘보는 방식’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전개된다(이영욱). 거울에 비친 그림 그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한색조의 거친 붓칠로 묘사한 그의 자화상은 서울처럼 ‘불안하고 초조하고 어수선한’ 자아를 보여준다. 요컨대 그에게서 서울 풍경을 재현하는 일과 자화상을 그리는 일은 등가다.

최진욱 「하교길 1」, 캔버스에 아크릴, 182x227cm, 1991(오른쪽)과 「자화상」, 캔버스에 아크릴, 130 x 89cm, 1992(왼쪽 아래).

민경숙, The Cats, 종이에 파스텔, 48.2×61cm, 2009 (왼쪽 위).


그러면 이질적이고 파편화된 서울, 그리고 주체의 조각들을 부드럽게 이어 붙여 매끈한 전체를 만들 수 있을까. 아니면 부드럽고 편안한 어떤 안온한 장소로 도피할 수 있을까. 아마도 서울을 타향처럼 여기는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언젠가는 돌아갈 그리운 고향이 있다. 그러나 어떤 작가들에게 그 고향이 서울이다. 민경숙이 최근에 그린 소파 그림을 보자(아래 작품 ③). 그 소파는 우리가 기대하는 바와는 달리 부드럽고 푹신푹신한 편안한 소파가 아니다. 푹 꺼진 민경숙의 소파에는 균사가 창궐해 얼룩들이 퍼져 나간다. 아니면 최진욱처럼 시니컬하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건너온다. 4호선 지하철의 문틈에선 지린대가 난다. 요새 나는 지하철 안에서 영어 숙어집을 보고 있다. 천국에 가기 위해서. 만약 영어로 된 책을 술술 읽을 수 있고, 영화도 비디오도 영어로 술술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이 천국이지 무엇이겠나?”(최진욱, 「鳶」, 1995에서)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도 가득한

하지만 서울에 사는 우리 대부분은 민경숙이나 최진욱처럼 살 수 없다. 강영숙의 단편 「죽음의 도로」에 등장하는 ‘나’의 사정은 이런 사정을 대변해준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나’는 대출 자료 연체를 고시하는 도서관 메일 앞으로 자살 예고 답신을 보내고는 반납하지 못한 디비디의 행방을 궁금해 하며 추돌사고가 빈번히 일어난다고 알려진 강변북로를 질주하고 옛 애인과 동창에게 전화로 욕을 퍼붓는다. 그러나 ‘나’는 결국 집에 돌아오게 된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게 끝난다. 그것은 내게 서울의 리얼리티를 정말 잘 포착한 대목으로 다가온다.

“이메일을 열었다. 도서관 앞으로 보낸 이메일은 발신 전용 주소라며 태연히 돌아와 있었다. 라면을 끓여 먹고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았다. 텔레비전 아래 책과 비디오 등을 정리해 둔 서랍장 안에 세로로 얌전히 꽂혀 있는 그 디비디가 보였다.” (강영숙 「죽음의 도로」에서)

□ 인용된 소설들은 모두 『서울, 어느 날 소설이 되다』(강, 2009)에 실려 있다. 최진욱과 민경숙의 글은 『예술적 영혼에 상처받은 꿈을 위하여』(재원, 2000)에 실려 있다. 

홍지석 객원기자·미술평론가 kunst75@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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