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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유효한 ‘묵직한 화두’… 사상의 눈금 읽어내야 할 때
여전히 유효한 ‘묵직한 화두’… 사상의 눈금 읽어내야 할 때
  • 교수신문
  • 승인 2010.07.26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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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백년 논쟁의 사람들] <6> 나혜석

‘근대 백년 논쟁의 사람들’ 여섯 번째 인물은 晶月 나혜석(1896.4.28~1948.12.10)이다. 사회학 분야에서 총 3표를 추천받았다. 김영선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사회학)는 나혜석에 대해 “식민지 조선의 여성들이 체험했던 이중의 억압에 대해 여성주의적 통찰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나혜석은 근대 당시 화가이자 문인, 독립운동가 등 다방면의 활동을 통해 선구자적 면모를 보여줬다. 그러나 사생활로 인한 주홍글씨는 학계의 평가마저 가로막았다. 나혜석을 재조명하기 위해 김수진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사회학)와 윤범모 경원대 교수(미술사학)가 나섰다. 각각 사회학과 미술분야에서 나혜석이 지닌 논쟁점을 짚어봤다. 이 시대 나혜석은 어떤 평가가 가능할까. 

 

나혜석은 근대 한국의 여성해방주의 사상가다. 1914년 일본유학생 잡지 <학지광>에 시론 「이상적 부인」을 게재한 이후 1938년까지 그는 당시 조선지식계의 대표적인 잡지와 신문에 수 십 편의 시론과 수필, 만평, 그리고 시와 단편소설을 남겼다. 이 글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체계적인 저작이라고 할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글들은 당대 조선사회의 성별체계와 여성의 지위, 그리고 성도덕에 대한 총체적인 분석적 성찰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사상이라는 이름에 값할 만하며, 믿는 바대로 실행하기 위해 영욕의 세월을 살아갔다는 점에서 여성해방주의자라고 일컬을 만하다.

나혜석의 사상은 세간의 선입견과 달리 단순히 서구자유주의 여성해방론을 반복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일본유학과 구미여행을 통해 보고 접한 계몽주의 인간론과 여성해방론을 조선사회, 조선 여성의 역사적 조건과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접목시켰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육체적, 사회적, 일상생활에 대한 성찰에 기반해 여성주의 일반의 철학적 문제를 통찰했다. 또한 그의 글들은 오늘날 여성문학연구자들이 ‘여성적 글쓰기’의 모범사례라고 일컬을 만큼 입말의 표현이 뛰어나고 정감과 이성이 공존해 생동감이 넘치고 해학이 깃들어 있다.

여성을 딜레마에 빠지게 하는 사회구조 간파

 
그렇다면 나혜석이 제기한 여성해방주의적 사상의 논제들은 무엇인가.
첫째, 여성의 자기존중론이다. 나혜석은 「나를 잊지 않는 행복」이라는 제목의 똑같은 글을 두 번, 즉 살림살이와 어머니 역할을 함과 동시에 화가로서 살아가던 때와, 이혼 후 전업화가로 재기하기 위해 분투하던 시기에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여성이 자신의 몸과 정신을 온전하게 긍정하고 돌보는 것의 근본적인 중요성을 강조했다. 여성 스스로 ‘내심에 숨어있는 무한한 능력’을 자각하고 능력을 발현하고자 노력해야 함을 주창했다. 학교에 다니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여성들을 향해 욕심이자 허영이라고 질시하는 시선을 겨냥해, 오히려 욕심과 허영을 가져야 비로소 변화를 일구어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조선사회에서 남자는 너무 이기적이어서 문제고, 여자는 극도로 희생적이어서 문제라고 지적한다. 여성의 살림노동과 보살핌 노동이 남성의 임금노동 자체를 가능하게 함에도 남성들은 부인을 약자이자 열등한 사람으로 간주하는 한편 여자들은 스스로 자신을 비하하면서 딸은 천하고 아들은 귀하게 기르는 것이 조선의 생활이라는 것이다. 생산노동과 재생산노동의 성별분업과 위계화를 비판하고, 그 이데올로기에 체념적으로 순응하는 여성들의 의식을 지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여성성을 긍정하는 것과 남녀 간 평등한 지위를 추구하는 것의 딜레마적 구조 문제이다. 나혜석은 결혼해 살림하는 주부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어머니로, 동시에 화가로서의 삶을 살아가면서 이 사회구조가 여성으로 하여금 딜레마적 상황에 빠지게 한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모성 문제에 대한 글과 이혼 시 체험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는 이혼 당시 당연히 재산분할을 요구할 만큼 여성들의 살림노동과 보살핌노동의 가치를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 노동이 여성에게 전담돼 있는 성별분업구조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지는 않았다. 오히려 당시 신여성들 일반이 처한 비난의 눈초리, 즉 여성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리라는 시선에 대항하기 위해 ‘내 몸에 비단옷을 입어본 일이 없었고 일분이라도 놀아본 일이 없’을 정도로 살림살이를 알뜰히 했다.

하지만 그런 만큼 화가로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시간과 돈을 만드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다. 또한 아이를 가지고 낳아 기르는 모성적 존재로서의 여성이 조선사회에서 처한 현실은 고통과 행복을 동시에 수반하는 것임을 냉철하게 분석했다. 한편으로는 아이를 기르며 갖게 되는 애정과 책임감이 다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행복감을 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하는 고통을 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자유연애와 정조해방론이다. 나혜석이 사회적으로 파란을 일으킨 것은 이혼 후의 주장이다. 나혜석은 「이혼고백장」과 「신생활에 들면서」, 「독신여성의 정조론」 등을 통해 ‘정조론’, 즉 연애와 성 및 결혼의 관계에 대해 급진적인 주장을 제기했다. 그는 조선의 남성들이 ‘자신은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나 일반여성에게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한다고 비판하면서 정조 그 자체의 해방을 주장한다.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라는 유명한 말은 도덕이나 제도로 성적 욕망을 강제할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내면적 독특성에 기반 한 선택에 맡겨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결혼이 불러올 권태와 실망을 줄이기 위해 결혼시기를 최대로 늦추고 독신생활을 늘리되, 성욕해결을 위해 여자공창과 남자공창이 필요하다고까지 했다.

나혜석의 이러한 정조론은 이혼과정에서 남성들의 패거리문화와 남성 지배구조를 처절하게 느끼면서 구체화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결혼이 ‘네가 내게 없어서는 아니 되고 내가 네게 없어서는 아니될 무엇 하나’가 있는 이상적인 연애에 기초한 생활은 아니었다고 암시한다. 그럼에도 결혼을 유지하고자 했고, 자신의 혼외관계가 양심을 속이는 일이 아니었으되 도덕과 법률을 어긴 것이기에 남편에게 잘못을 빌고 매달렸다고 한다.

하지만 나혜석에게 돌아온 것은 재산, 자식, 명예, 지위의 완전한 박탈이었고, 남성들에게는 그 어떠한 타격도 있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남성중심적 성도덕과 결혼제도를 비판하면서 개인의 자유의지와 개성에 의해 유지되는 성과 사랑 그리고 결혼관계의 상을 가설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정조는 오직 취미’ 개인의 자유의지 주장

나혜석은 한국 근대역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 중 하나다. 많은 작품을 남기고 당대에 큰 영향력을 미쳤으며 삶과 행적이 논란거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1930년대 말 이후 그는 공식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나혜석은 사실상 여성에 대해 말할 권리를 얻는 댓가로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처형됐다. 그가 자신이 믿는 바를 공적 담론의 장에서 말하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영욕을 겪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가 1990년대 이후 의도적 망각과 풍문 속 인물이 아니라 지성사의 한 켠을 차지하는 인물로 복권됐을 때, 그를 명명하는 핵심어는 작가와 미술가였다. 그에 비해 그의 사상과 삶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여전히 회피의 지대에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가 작가이자 미술가이면서 동시에 여성해방주의자라는 사실은 서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가 작가이고 미술가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여성해방주의자였기 때문이며, 그가 여성해방주의자일 수 있었던 것은 작가와 미술가의 삶이 가져다준 자기성찰의 힘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나혜석이 식민지시대 조선여성의 지위와 조선사회의 성도덕에 대해 던진 질문과 그의 삶에 대해, 선각자이되 시대를 ‘너무’ 앞선 여성이라고 묘사함으로써, 정작 그의 사유와 실천이 당대의 맥락에서 가지는 의미와 정치성을 희석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그가 제기한 문제들은 21세기 현재 한국사회에서도 유효성을 잃지 않는 묵직한 화두이기 때문이다.

 

김수진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 · 사회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를 했다. 주요 논문으로는 「전통의 창안과 여성의 국민화」, 저서로는 『신여성, 근대의 과잉- 식민지조선의 신여성담론과 젠더정치, 1920~1934』 등이 있다.


晶月 나혜석

1896년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1913년 진명여자보통고등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후 일본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유화과에서 유학했다. 1918년에 첫 소설 『경희』를 발표한다.1919년 3.1운동에 적극 가담해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1년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조선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유화 개인 전람회를 개최해 대성공을 거뒀다. 결혼생활 실패 후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장원으로 특선하고 같은 작품으로 일본 제국미술원전람회에서 입선했다. 1948년 시립 자제원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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