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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인물] 누가 澗松 전형필을 골동품수집가라고 했나
[역사 속의 인물] 누가 澗松 전형필을 골동품수집가라고 했나
  • 백인산 간송미술관 연구위원
  • 승인 2010.07.26 13: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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澗松 전형필
조선을 강제 병합한 일본은 문화 수준이 높은 민족을 무력으로만 통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곧 깨닫는다. 이에 우리의 역사를 왜곡시키고, 우리 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하는 등 민족 문화를 말살시키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탄압을 자행한다. 문화재인들 온전할 리 없었다. 수천년 동안 지켜 내려온 최고급 문화재가 약탈당하거나, 헐값에 팔려나가 일본인에게 속절없이 넘어가는 비운을 맞게 된다.

민족문화의 전통이 일시에 소멸돼 가는 현장을 목도한 간송 전형필(1906-1962)은 국중 제일의 재산을 모두 기울여 우리 문화재를 지키고, 일본 사람들 손으로 넘어간 문화재를 되찾아 오는 데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한다. 휘문고보 시절 미술교사였던 춘곡 고희동(1886-1965)이나, 민족대표 중 한 명으로 3·1운동을 주도했으며, 서화 감식에도 정통했던 위창 오세창(1864-1953) 등의 조언과 훈도가 자극이 되었던 듯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간송 자신이 시대적 사명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예지와 막중한 과업을 수행하고자 하는 열정과 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결과 전통 문화의 정수가 오롯이 담겨있는 수 많은 우리 문화재들이 간송의 품에 들어오게 된다. 국보 70호 훈민정음, 고려 청자의 대표작인 국보 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조선백자를 대표하는 국보 294호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 조선후기 풍속화의 결정인 국보 135호 혜원전신첩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畵聖으로 추앙받는 겸재 정선(1676-1759)과 한국 서예사에 대미를 장식한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작품도 집중적으로 수집했다. 겸재와 추사의 작품들이 한없이 왜곡된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복원할 수 있는 열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간송은 수집한 문화재들을 지금의 성북동에 터를 잡아 수장했는데, 이것이 1938년에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이다. 간송이 돌아가고 보화각은 간송미술관으로 개칭되었고, 이후 40여년 동안 그 수장품을 중심으로 연구와 전시를 병행하며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확인시키고, 나아가 우리 역사를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준을 마련했다. 간송이 문화재를 모은 眞意가 실현돼가는 과정이라 할 것이다.

간송의 文化保國에 대한 집념과 열정은 문화재의 수집·보존에만 그치지 않았다. 고종의 칙명을 받들어 설립된 보성중학교가 재정난으로 폐교 위기에 몰리자, 막대한 출혈을 감수하면서 인수했다. 인재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당시 문학과 예술에 종사하는 많은 문예인들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하기도 했다. 이 모두가 우리 민족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켜 후세에 올바르게 전수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 일이다.
야만과 문명을 가늠하는 척도는 문화 전통의 유무와 그 수준이다. 그런데 이 문화 전통의 실체와 수준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실체적으로 증빙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하고 명확한 수단은 다름 아닌 문화재다. 특히 서구 열강의 침탈과 일제 식민지를 거치면서 문화전통이 단절되는 경험을 겪었고, 歷史像의 왜곡과 정체성의 혼돈이 엄존한 현실에서 문화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간송은 일찍이 이를 간파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을 실천하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물론 간송 이외에도 근현대를 거치며 몇몇 사람들이 우리 문화재에 관심을 가지고 수집했으나, 好古취미나 감상 차원, 혹은 물질적 가치를 염두에 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간송은 우리 민족 문화의 수호와 전승이라는 확고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이를 위해 어떠한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간송을 단순한 골동품 수집가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구의 이념과 문화에 압도돼 우리 전통문화와 그 유산을 폄하하거나, 관광자원 정도의 공리적인 시각으로만 문화재를 평가하려는 작금의 현실은 간송이 살았던 시대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더불어 높은 사회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이에 상응하는 책임과 의무를 방기한 채 개인의 영달만을 추구하는 것을 당연시 하는 사람이 대다수인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최근 간송의 수장품은 물론, 간송이라는 인물 자체에 대해 관심이 커지는 것은 이런 세태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으며, 이런 관심이 증폭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문화재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깨닫는 계기로 이어졌으면 한다. 간송의 바람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백인산 간송미술관 연구위원

동국대에서 「조선시대 묵죽화 연구」로 미술사학 박사를 했다. 『조선의 묵죽』,「朝鮮王朝 道釋畵」 등 다수의 논저가 있다. 2000년부터 간송미술관 연구위원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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