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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먹는 입’이다” … 환대에서 연대로
“인간은 ‘먹는 입’이다” … 환대에서 연대로
  • 진은영 이화여대·사회철학
  • 승인 2010.07.12 15: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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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인문학을 위한 제안

소통의 인문학을 정립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점들을 다음과 같이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평등한 소통에 대한 인문학적 담론은 먹는 입과 말하는 입의 엄격한 구분을 통해 먹는 입의 흔적을 지우려고 하기보다는 인간이 먹는 입으로 말하기도 할 뿐 아니라 말하는 입으로 먹기도 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예컨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불평등한 현실을 외면하는 대가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사용자와의 협상에서 자신들의 몫을 챙기며 경제적 투쟁에 몰두할 때 그들은 오직 ‘먹는 입’으로만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익 집단의 사회적 정체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의 발언은 이미 정해진 사회적 의미 유통의 선을 따라 순환할 뿐이다. 그러나 이 노동자들이 현존하는 경제적 재분배 방식의 정당성을 파열시키는 방식으로 표현될 때, 즉 그들이 여성, 비정규직, 이주 노동자들에 대해 말하고 그들과 함께 말할 때, 그들은 단순히 먹는 입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공통의 문제에 대해 말하는 것이 된다. 모든 먹는 입들의 평등성에 대해 말하는 것은 먹는 활동인 동시에 말하는 활동이다. 먹는 입들에 대해 말하기, 식탁에 초대받지 않은 자들에 대해 말하기, 식탁을 차렸지만 정작 식탁에 앉지 못하는 자들의 식사에 대해 다시 말하기,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보편주의적 소통이며 정치이다.

둘째, 소통의 인문학은 절대 타자의 형상에 대해 재고할 필요가 있다. 절대 타자의 형상은 그에 대한 환대를 이야기할 때조차도 이미 우리·타자라는 경계를 전제한다. 이주노동자, 다문화 가정의 현실은 불평등의 상황을 포착하는 데 순수한 타자성의 형상이 효과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보레일의 개념을 빌어 랑시에르가 표현했듯이 그들은 준-타자(quasi-autre)이다. “준-타자는 동일자의 타자적 형상의 가치를 갖기엔 충분히 타자적이지 않다. 우리는 준-타자를 그의 ‘집’으로 돌려보낼 수 없다.” 타자는 우리 곁에서 극단적 근접성을 갖고 존재한다. 이 말은 단순히 그들을 동네나 거리에서 쉽게 마주친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로, 산업재해의 희생자로, 성폭행당하는 여성노동자로, 또는 매 맞는 아내로, 우리와 충분히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는 빈자로 존재하며 이 때문에 환대가 아니라 다양한 방식의 연대가 가능하다. 소통의 인문학은 절대적 타자성의 전제가 어떻게 새로운 연대의 운동 속에서 해체될 수 있는지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만일 폐쇄적이고 독단적인 주체철학의 횡포에 대응하기 위해 절대적 타자 개념을 계속 고수하려고 한다면, 절대적 타자의 관념을 타인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시켜야 할 것이다. 우리는 타자에게 가닿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타자조차도 그 자신에게 가닿을 수 없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가닿을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가 타자와 만나는 순간 우리도 타자도 모두 자신이 아닌 것으로 변모한다. 양자는 만남을 통해, 혹은 연대를 통해 모두 자기 자신의 타자가 돼버린다. 타자와 나의 소통은 고정된 정체성들 사이의 소통이라기보다는 만남을 계기로 기존의 정체성으로부터 탈주함으로써 각자가 가닿을 수 없는 자아와 공동체들을 발명하는 사건이다.

셋째, 탈경계적 보편주의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현존하는 보편주의적 주장들의 협소성과 경계적 함축을 폭로하는 비판적 과학과 더불어 타정체화의 상상력을 고양시키는 계기가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소통의 인문학은 소통의 시학을 내포해야 한다. 경계를 지우는 작업은 경계에 대한 폭로에서가 아니라 외적 경계를 횡단하는 연대의 상상력, 그리고 위계화 된 내부의 경계를 횡단하는 탈주의 활동에서만 완수되기 때문이다.

이 시학적 작업은 보편주의의 기획 아래 실행된다. 이는 우리가 먹는 입으로 말할 수 있는 가능성, 즉 함께 먹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믿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가능성에 대한 믿음은 인간이 먹는 것을 제외하면 그 밖의 모든 것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보편주의는 수행됨으로써만 입증되는 것이다. 따라서 소통의 시학은 정치적·사회적 운동 속에서 현실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탈정체화의 유의미한 사례들을 학문적으로 기입하고 소망할 만한 탈정체화에 대한 상상력을 촉진시키는 사유들을 발명해야 한다. 이를 통해 불가능하다고 판정된 실존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열어주는 것, 그것이 소통의 인문학이다.

□ 이 글은 <탈경계 인문학>(3권2호 제6집, 2010)에 실린 논문 「소통, 그 불가능성의 가능성」의 결론을 요약한 글이다.

진은영 이화여대·사회철학

이화여대 탈경계인문학단 HK연구교수. 시집『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이 있고, 『니체의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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