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22:25 (목)
[學而思] 문명의 새로운 구분
[學而思] 문명의 새로운 구분
  • 이정덕 전북대·문화인류학
  • 승인 2010.06.28 14: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8년도부터 HK사업인 쌀·삶·문명연구원 원장을 맡게 되자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연구원의 교수나 HK교수로 있는 역사학, 철학, 문학, 언어학, 미술사, 민속학, 문화인류학, 인문지리학, 생태학, 농경제학, 사회학, 과학학 등의 다양한 전공자들과 함께 동아시아에서 인도에 이르는 지역의 쌀문화에 기초한 자연, 인간, 문명의 연구를 통해 서구문명담론을 넘어서기 위한 전략을 제시해야 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나 베버를 비롯한 서구학자들 대부분이 서구우월주의에 빠져 서구의 기여와 중요성을 과장하고 비서구를 왜소화하고 부정적으로 묘사해왔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편견 속에서 성장해온 서구적 개념과 담론이 우리의 학문과 일상 담론을 주도하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많은 개념 자체에 이미 서구우월적 편견이 내재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서구우월주의 틀 속에 빠지게 된다.

근대, 민족, 민주, 시민, 인권, 합리성, 이성, 문화, 문명, 과학, 학문, 발전 등의 개념도 이미 서구우월적 편향성을 지니고 있지만 특히 주목받고 있는 것은 사이드가 보여줬던 동양과 서양의 구분에 내재돼 있는 오리엔탈리즘이다. 쌀·삶·문명연구원이 고민하는 핵심 문제의식은 동양과 서양의 구분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이다. 고대그리스가 그리스와 페르시아를 나누던 임의의 선이 서구가 득세하면서 세계의 문명권을 나누는 선이 됐다. 이러한 구분은 농업시대의 문명권을 왜곡시키고 있다.

농업시대 문명권 구분은 그 시대를 구성하는 핵심동력인 생태환경과 농업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 맞다. 유라시아대륙에서 생태환경과 농업을 중심으로 구분하면, 쌀 문명권(동아시아+인도), 밀 문명권(중동과 유럽), 그리고 이들 사이에 혼재하거나 북방에 존재하는 유목문화권으로 구분하는 게 훨씬 타당하다. 브로델이 쌀과 밀을 ‘문명의 작물’이라고 했듯 이들 작물이 해당 지역의 생태환경을 반영해 삶의 근간이 되고 문명을 만들고 발전시키는 토대가 됐기 때문이다. 우리 연구원에서는 ‘문명의 작물’에 기반한 문명권 설정과 관련 연구를 발전시켜 동양과 서양이라는 근거가 박약한 서구중심적 문명담론을 대체하는 것을 장기적인 목표로 한다.

이러한 시야에서 쌀문명권의 연구는 먼저 쌀이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재배되고 확산됐는지에 집중한다. 또한 쌀이 월령, 세시풍속, 민속, 일상생활, 사회관계뿐 아니라 가치, 사상, 언어, 문학, 예술 등에 반영되고 소유권과 수취제도를 통해 사회관계와 국가와 제국의 기반이 됐는지, 종교, 가치, 사상, 제도를 통해 어떤 식으로 문명을 형성했는지를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분석하고 있다. 물론 쌀에 기반한 삶, 문화, 문명이 다양한 요소들과 상호작용하고 밀문명권이나 유목문화권과의 지속적인 교류와 혼성을 통해 형성돼 왔기 때문에 이러한 복합적인 측면을 고려하되 동아시아에서 도작농경이 가졌던 중요성을 놓치지 않을 생각이다.

이러한 문명권 설정은 세계사 해석을 이제까지와 다르게 할 것이다. 유럽이 만들어낸 동양과 서양의 구분은 기본적으로 서구가 자신들의 동질(기독교)의 지역을 서양으로 고정시키고 나머지 모든 지역(동양)보다 우월하다는 편견을 담으면서 발전해 왔다. 따라서 동양과 서양은 서양의 우월성과 동양의 열등성을 이미 그 안에 내재하고 있다. 쌀 문명권, 밀 문명권이라는 용어는 이러한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을 문명권 개념에서 탈색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동아시아가 일찍부터 축적해온 다양한 종교, 기술, 제도, 사상, 학문, 예술을 제대로 평가하고 해석하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다. 더구나 1800년대 초반까지 서구는 이슬람, 인도, 중국으로부터 많은 선진기술과 문명을 받아들였고 이것들은 유럽의 르네상스, 계몽주의, 산업혁명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대항해시대라고 기술되는 서구의 급속한 팽창에도 불구하고 1800년대 초반까지 서구가 동아시아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이 정설이 되고 있다. 갈수록 1800년대까지 동아시아가 유럽보다 수준 높은 경제, 기술, 제도를 가지고 있었고 더 풍부한 사상과 예술전통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쌀·삶·문명연구원은 각종 연구와 학술대회를 통해 동아시아의 도작과 농법의 확산, 생태관, 자연관, 월령, 세시풍속, 종교와 사상, 제도와 통치, 인간관, 세계관, 문명관 등을 분석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또한 ‘조선의 브리태니커’라고 불리는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등 한국의 문명사적 가치와 의미를 보여줄 수 있는 고전들을 골라 번역, 연구하고 있다. 한강, 금강, 토네카와강, 양자강 등 ‘강과 문명’연구를 통해 쌀문명권의 도작농업을 매개로 한 삶과 문명발전을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들을 축적해 앞으로 세계의 학자들과 교류를 늘리고 해외출판을 확대하고 왜곡된 서구의 문명담론을 극복하고자 한다.

이정덕 전북대·문화인류학

필자는 미국 뉴욕 시립대에서 박사를 했다. 공저로는 『아시아 생태문화』 등이 있으며, 현재 전북대 쌀·삶·문명연구원 원장으로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