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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통신원리포트] 영국 : 들뢰즈 이후 연구 경향
[해외통신원리포트] 영국 : 들뢰즈 이후 연구 경향
  • 이택광 / 영국통신원
  • 승인 2002.05.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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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5-01 20:12:11
이택광 / 영국통신원·셰필드대 박사과정

20세기가 들뢰즈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던 푸코의 예언은 적중한 것일까. 바야흐로 들뢰즈를 빼놓고 우리는 20세기의 사상을 논할 수 없게 됐다. 그러나 들뢰즈에 대한 성급한 짝사랑을 진정시키고 눈여겨본다면, 이런 인기 자체가 좀 기이하게 여겨질 이유는 충분하다. 정작 프랑스에서 들뢰즈는 수많은 이론가들 중 한 명에 지나지 않는 반면, 오히려 별 연고도 없는 듯한 미국에서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경우도 들뢰즈 철학을 본격적으로 거론하고 연구하는 곳은 상당히 드문 실정이다. 물론 영미철학계에서 이단으로 취급당하는 워릭대의 철학과가 들뢰즈 연구로 일찌감치 명성을 얻고 있지만, 이 또한 초기 들뢰즈의 ‘차이 철학’에만 매달리는 편향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워릭대 철학과를 대표하는 연구가이기도 한 키스 안셀 피어슨의 ‘新生의 삶’은 들뢰즈의 철학과 다윈의 진화론 그리고 니체의 영원회귀를 연관지어 논했던 책이기도 하지만, 다분히 물질주의적 차원에서 들뢰즈의 사상을 조감하는 협소함을 보이고 있다. 최근 들어 주목할 만한 경향을 들자면, 이언 부캐넌의 편집으로 에딘버러대에서 발간된 들뢰즈 연구시리즈를 거론할 수 있겠다. ‘들뢰즈와 문학’, ‘들뢰즈와 페미니스트 이론’이 그것인데, 여기에서 우리는 들뢰즈와 접합되는 분과학문들의 양상을 차례차례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문학연구에서 가장 중심적으로 적용되는 들뢰즈의 개념은 바로 ‘됨’(becoming)이다. 서구 형이상학적 존재 개념인 ‘있음’(being)의 개념을 거부하는 들뢰즈의 철학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바로 이 ‘됨’의 개념을 발전시켜나간 것이라고 하겠다. ‘천 개의 고원’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멜빌의 ‘모비딕’에 대한 탁월한 분석을 이 ‘됨’의 개념을 사용해서 전개하고 있다. 문학에 대한 들뢰즈의 관점은 주로 ‘기호’ 개념에 대한 갱신을 통해 이뤄진다. 들뢰즈는 구조주의적 입장에서 기호를 보는 것에 반대해서, 기호를 언어체계 내로 한정짓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구조주의적 기호학을 벗어나기 위해 들뢰즈는 프랑스 지식계에서 다소 낯선 영미 언어철학의 전통을 활용한다. 그러고 보니 들뢰즈의 박사논문이기도 한 ‘경험주의와 주체성’은 영국 철학자 흄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모든 철학은 그 처음 단계에서 경험적인 것이라는 들뢰즈의 명제는 그의 후기 작업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들뢰즈가 단순하게 영미 언어철학을 대안으로 설정함으로써 새로운 사유의 탐색을 행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그의 철학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것은 스피노자에 대한 그의 관심과 해석이기 때문이다. 이런 스피노자에 대한 연구를 통해 들뢰즈는 표현(expression)과 표현성(expressivity)이라는 훨씬 더 거대한 영역으로 기호의 문제를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에딘버러대의 새로운 시도

기호에 대한 들뢰즈의 독창적 관점에 입각한 문학연구는 최근 페미니즘과 들뢰즈를 연관짓는 경향으로 발전하고 있는 듯하다. 이 중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도로시어 올코우스키의 ‘질 들뢰즈와 재현의 폐허’이다. 이 책에서 올코우스키는 들뢰즈의 철학을 일컬어 ‘재현의 폐허’를 달성한 것으로 평가하면서,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들뢰즈의 철학은 변화의 존재론을 정립했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에딘버러대에서 발간한 ‘들뢰즈와 페미니스트 이론’에서도 들뢰즈와 페미니즘의 연관성을 논한 글들은 차고 넘친다. 특히 ‘천 개의 고원’에서 버지니아 울프를 거론하면서 ‘틈’의 존재로서의 여성을 거론하는 것은 이들에게 페미니즘으로 들뢰즈를 평가할 중요한 근거를 제공한다. 소녀는 여자가 돼야하기 때문에 여자는 ‘됨의 됨’이라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진술은 페미니즘의 입맛을 당기게 하는 구석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한편 들뢰즈에 대한 탈신화화 작업도 진행되고 있다. 알랭 바디우의 ‘존재의 아우성’이 들뢰즈 철학에 대한 과대평가를 경고하는 대표적인 논의라고 할 수 있다. 바디우의 말처럼, 들뢰즈의 철학에 내재한 초월성에 대한 갈구는 세계의 시뮬라크르를 말하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드리워져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역설은 들뢰즈가 고전적인 시뮬라크르를 극복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취하게 되는 대칭 개념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디우가 결론짓듯이, 이런 들뢰즈의 역설은 그의 철학이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들뢰즈의 철학은 푸코의 지적처럼, 새롭게 갱신된 단일자의 개념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재생산 구조 자체로부터 자신의 철학을 퇴거시킴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이런 들뢰즈 철학이 가진 혁명성에 주목한 것이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의 ‘제국’이지만, 아직도 들뢰즈의 철학을 실천적 정치학에 접합하기 위해 넘어야할 산은 높은 것 같다.

영미의 맑스주의자들은 ‘제국’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데, 무엇보다도 이 책이 정치적 문제를 미학적 문제로 과도하게 범주전환을 시켰다는 것이 그 근거이다. 이 책의 발간 후, ‘신좌파평론’에 실린 서평에서 고팔 밸라크리쉬넌은 이 책의 주장을 일종의 좌편향으로 비판한다. 한마디로 자본주의의 현실에 대한 피상적 이해를 바탕으로 아방가르드적 미학주의에 경도된 결론을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반론에 대한 재반론 역시 만만한 것은 아닐 터이다. 원칙적으로 본다면, 들뢰즈와 가타리의 ‘앙띠 오이디푸스’는 60년대 서구 노동운동의 좌절을 드러내는 징후이기도 하다. 흥미롭게도 그들이 복원한 계열성과 사건의 우발성은 사르트르적 테제의 복원을 의미하지만, 정작 그들은 사르트르의 계급 개념을 소거시킴으로써 자신의 정치학을 수립할 수가 있었다.

들뢰즈 과대평가 경고 목소리도

갈수록 강화되는 자본주의의 리얼리티 앞에서 들뢰즈의 철학이 지속적으로 변화할 수 있을까. 이런 변화에 대한 가장 큰 걸림돌이 들뢰즈의 철학을 끊임없이 ‘존재론’으로 환원시키려는 시도에서 발생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한 일이다. 이미 하이데거를 통해 이런 존재론의 문제점이 증명됐던 전례를 감안한다면, 들뢰즈 역시 형이상학을 허문 자리에 또 다른 형이상학을 세운 철학자로 낙인찍힐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하겠다. 20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라는 들뢰즈가 21세기에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을까. 물론 들뢰즈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그 스스로 플라톤이 되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21세기도 들뢰즈의 세기로 기억되기 위해서 지금 들뢰즈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의 철학을 정치학으로 개방시킬 그 어떤 실천의 고리일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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