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1-07-30 17:50 (금)
[문화비평] 정문길 교수를 생각하며
[문화비평] 정문길 교수를 생각하며
  • 이승우 도서출판 길ㆍ기획실장
  • 승인 2010.05.31 15: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책을 만드는 사람들끼리의 경쟁이 있다. 역량 있는 필자의 발굴과 원고를 갖고 최고의 책을 만들려는 선의의 경쟁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선의의 경쟁상대로 생각하고 있는 다른 출판사에서 무게감 있는 책이 출간되면 긴장하게 되고, 부러움을 느끼기도 하고 때때로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최근 그런 경험을 했다. 책이 출간됐을 때는 대략적으로만 읽어두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다시금 손에 들린 그 책은 나를 일주일간 무아지경에 빠뜨렸다. 바로 정문길 교수의 『니벨룽의 보물』(문학과지성사, 2008)이다.


이 책은 칼 마르크스 사후 그의 저서와 유고, 서간 및 관련 자료들이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거쳐 독일사민당으로 지적 유산의 승계, 그리고 나치 집권 아래에서의 유실 위기와 분산, 레닌과 스탈린 치하와 동독에서의 전집 간행(구MEGA판과 MEW판), 1970년대 중반 이후 지속돼 현재는 국제적인 협업 체제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신MEGA판의 역사가 흥미진진하게 전개되고 있다. 분량도 만만치 않고 내용 역시 꼼꼼하게 서술된 것을 따라가기에는 사전 지식이나 시대 상황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좀 버거울 수도 있지만, 솔직히 나는 소설(!)처럼 읽었다. 그렇다고 이 책을 무슨 에세이집이나 교양서로 보면 안 된다. 그것은 바로 저자의 평생 연구 역량이 결집된, 이른바 최고 수준의 학술서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제 49회 한국출판문화상 학술 부문 수상작이기도 했는데, 김상환 서울대 교수(철학)는 다음과 같은 심사평을 했다. “문서들이 이합집산하는 묘연한 행방들, 문서들의 출판과 관련된 여러 인물들의 헌신과 갈등, 전승 과정마다 문서가 겪어야 했던 역사적 질곡과 기구한 운명이 드라마처럼 펼쳐진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문헌에 바친 한 평생의 연구가 남기는 또 하나의 역작이다.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가는 고집스러운 학자의 모습은 오늘날의 젊은 인문학도들에게 커다란 귀감이 될 것이다.”


그렇다. 내가 일주일 동안 들뜬 기분에 사로잡힌 것은 바로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가는 고집스러운 학자의 모습”때문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지적 유산이 어떻게 됐을까 궁금해 하며 책장을 넘기면서 느낀 소설적 재미는 여분의 기쁨이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수상소감을 들춰보니 또 나를 긴장시킨다. 오래전 펴냈던 『소외론 연구』에서 한 문장을 인용하면서 마르크스의 것이라고 했는데, 10년 뒤에 그것이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였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것이 학자로서의 평생의 흠이라고 하신다. “원전을 꼼꼼히 살펴보지 않아서 생긴” 일임을 밝히시면서…….


잠깐 샛길로 나가보자. 고전문헌학이라는 것이 있다. 한 문헌이 최초의 원전으로부터 어떤 과정을 걸쳐서 현재 우리에게 오게 됐는지를 해명하고, 그 전승과정 가운데 생긴 오류들을 교정해서 최초의 원전을 복원하려는 학문이 바로 고전문헌학이다. 100여 년전 이 학문세계에 걸출한 두 학자가 있었으니 바로 빌라모비츠와 니체였다. 다만 빌라모비츠는 철저한 자료 실증주의에 입각해 고대의 원전의 본모습을 복원해내려 했다면, 니체는 ‘어제의 고전’이 아니라 ‘고전과 오늘’의 문제를 갖고 싸웠다.


즉 니체는 지나치게 원사료에 묻혀 현재적 관점이 묻히는 것을 경계했다. 그러면서 니체는 철학의 세계로 갔고 빌라모비츠는 남아 고전문헌학계의 거장이 됐다. 누가 승자였고 누가 패자였는지를 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고전이나 원전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고 또 그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학문 세계를 발전시켜 나간 ‘학문하는 자세’에 대한 경이로움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가는 길은 달랐지만, 그 시작은 바로 원전/원사료로부터 시작됐다는 것.


인문ㆍ학술출판계에서 필자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렵다고들 아우성이다. 젊은 연구자들의 톡톡 튀는 주제와 글쓰기는 한동안 출판계에 단비처럼 신선한 충격을 줬지만, 비슷비슷한 주제로 모여가고 그 이상의 연구역량이 응축된 책을 펴내는 학자를 찾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는 것이다. 고만고만한 인문교양서는 쏟아지는데, 자기 분야의 학문을 선도할 만한 괄목한 역자는 찾아보기 힘든 형국이다. 평생을 바쳐 연구할 주제가 아니라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연구주제가 정해지는 그런 세태가 아닌가. 그래서였다. 정문길 교수의 책이 눈에 번쩍 띈 것은. 굳이 그것이 학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인문출판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도 ‘책’에 접근하는 자세를 일갈해준다는 점에서 타산지석의 귀감이 된다고 본다.


‘근원’에 대한 충실성, 원전에 대한 경외감과 그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추구하는 자세가 인문학의 또 다른 하나의 세계라고 한다면, 그런 학자들이 외진 곳에 있더라도 외롭지 않을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는 그런 정신은 반드시 ‘책’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이승우 도서출판 길ㆍ기획실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