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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쟁점] 지역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학술쟁점] 지역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 권진욱 기자
  • 승인 2002.05.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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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5-01 14:27:35

지역감정, 지역차별, 지역갈등, 영남패권, 호남문제. 지역주의라는 개념은 이처럼 지역과 관련, 다양한 맥락의 사회 현상을 아우른다. 한국에서 지역주의가 사적 네트워크, 정치적 동원, 경제적 발전 등 사회 각분야에 걸쳐 구성원들의 삶에 커다란 위력을 가져왔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만한 사실. 그래서 지역주의는 학계에서도 언제나 실천적인 사회 의제이자 흥미로운 연구 소재로 받아들여졌다. 그렇지만 정치적 격변기나 선거시기만 되면 뜨겁게 가열됐다가도 쉽게 식어버리는 이론적 경기곡선을 보여왔다.

근래에 들어서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진행되고 소위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뤄지면서 낙관적인 전망이 팽배하고, 그간 국내 연구가 상당량 누적되면서 지역주의 연구가 정체되는 인상을 줬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경향에 대해 김만흠 가톨릭대 교수(정치학)는 우려를 표한다. 지난 1987년 이후 한국 지역주의에 대한 이론화 작업을 계속해온 김 교수는 “우리 사회가 아무리 합리화됐다 해도 시골농부의 송사에서부터 취직, 승진, 청와대 비서관의 인사청탁에 이르기까지 출신 지역의 문제가 온존하지 않느냐”라고 반문한다. 아직까지도 지역문제를 ‘죽은 개’ 취급하듯 할 수 있을 만큼 편안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지역주의는 박정희 이후의 유산”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정치학)에 의하면 한국 지역주의에 대한 연구는 접근방식에 따라 근대화론, 비판이론, 합리적 선택이론의 세 가지 경향으로 분류된다. 조 교수는 “이론적 틀을 갖추기 이전에는 역사적인 접근법이 많았지만 제3공화국 이후 인사나 분배에서의 지역차별과 광주민주화항쟁 등 최근의 정치적 사건에 강조점을 두는 쪽으로 논의가 모아지고 있다”고 소개한다. 신복룡 건국대 교수(정치학), 김병국 고려대 교수(정치학)와 같이 전통사회에서 지역주의 담론이 형성된 과정을 탐구하는 근대화론을 예외로 한다면, 오늘날의 지역주의 양태는 직간접적으로 박정희 통치 이후 지속된 영남지역의 권력 재생산과 호남지역에 대한 선택적 배제로 보는 쪽으로 수렴하고 있다.

지역감정에 대한 본격적인 이론화 작업이 이뤄지게 된 계기는 뚜렷한 양대선거에서 지역 분할구도를 보인 1987년 직후부터였다. 심리학회가 이듬해에 연 ‘심리학에서 본 지역감정’라는 심포지엄이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라는 것이 학계에서는 정설로 통한다. 이어 1990년대로 넘어오면서 최장집 고려대 교수(정치학), 전병재 연세대 교수(사회학), 유석춘 연세대 교수(사회학), 김만흠 교수 등이 정치적,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지역균열을 다루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가장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비판이론적 경향이었다. 지역문제 해결을 실질적 민주주의를 위한 조건으로 보는 최장집 교수의 작업이나 ‘지역패권주의’라는 말을 공식화시킨 한글학자 남영신의 문제제기는 이후 문제의 심각성을 제고시키고 이론적 급진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90년대 중반 이후 ‘김대중 죽이기’의 강준만 전북대 교수(언론학), ‘지역패권의 나라’의 황태연 동국대 교수(정치학)와 ‘3김을 넘어서’의 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학)의 작업은 ‘정치비평’, ‘인물과사상’ 등 출판 저널리즘과 접합, 지역주의 문제를 한국사회 균열구조의 핵심요소로 부각시키는 역할을 했다. 또한 지역패권론, 수평적 정권교체론, 내부식민지론 등 비판이론 진영이 만든 개념들은 현실담론과 제도정치에서도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이 논쟁을 통해 연구자들은 지역주의의 실체를 인정하고 정치적 전략의 중요성을 역설했지만 지역주의의 해소방안, 정치인 DJ에 대한 평가에서는 서로 상반된 대안을 내세웠다. 황 교수는 지역문제를 호남 소외문제로 보고 민주화와 직결시켰고 강 교수 역시 DJ에 대한 지지가 호남 차별 해소에 기여한다고 주장한 반면, 손 교수는 지역문제를 민주-반민주 구도의 하위 개념으로 보고 DJ 지지론의 허구성을 비판했다. 그러나 강 교수는 감정적이고 논리 전개에서 비약이 심하다는 점에서, 황 교수는 ‘저항적 지역연합론’이 주체와 방향이 불분명하다는 선에서, 손 교수는 양비론적 비판은 결국 기득권에 대한 역설적 지지로 비칠 수 있다는 면에서 비판받았다.

균열구조 방치말고 통합방안 고민할 때

‘합리적 선택이론’에 속할 수 있는 연구자들로는 조 교수를 비롯, 이갑윤 서강대 교수(정치학), 김용학 연세대 교수(사회학) 등이 꼽힌다. 지역주의나 선거 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과학 연구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는 이 이론은 특정 시기의 역학관계와 행위자들의 선택을 통계나 문헌자료를 들어 꼼꼼이 검토, 전통적인 근대화론이나 비판이론에서 파생된 여러 가지 억측과 거품을 걷어내는데 공헌했다. 지역주의가 우리나라가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는 항간의 인식이나 대통령만 바뀌어도 상당부분 개선된다는 발상, 지역주의적 선거가 유권자의 탓이라는 논의를 반박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한동안 침체상태에 빠졌던 지역주의 논의도 대선과 지방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다시 수면위로 떠오를 기미를 보이고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전통과 현대’가 2002년 봄호 특집으로 선보인 ‘세계 속의 지역주의’라는 기획과 동명의 출판사에서 내놓은 ‘현대 한국사회 성격논쟁’이라는 책. 두 작업에 참여한 유석춘 교수는 “어차피 회피할 수 없는, 우리사회의 거대 구조물인 이상, 지역감정을 백안시하기보다는 자산으로 활용해야 한다”하고 주장한다.

하지만 지역주의 연구는 엄연히 지역분권화나 권력분점의 문제로 접근하는 데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다. 학계에서는 지역마다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이상 지역주의 투표는 당연한 것이고 지역간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이후의 올해 대선은 지역주의 논의의 축이 상당부분 다른 것으로 바뀔 것이라고 보고 있다. 호남과 비호남이라는 대립구도가 상당부분 퇴색하는 대신 중앙과 지방이라는 중앙집권의 문제가 더욱 부각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것. 지방자치가 중앙에서 지방으로의 대폭적인 권한 이양을 내세우는 것도 이런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지방자치의 활성화 수준이 아닌, 중앙에서 지방으로의 대폭적인 권한 이양을 요구하는 단계. 또한 최근 들어서 권력구조 개편을 주장하는 논의 역시 심심치않게 만날 수 있는데 진영재 연세대 교수(정치학)나 김만흠 교수가 내각제 혹은 이원집정부제를 선호하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밖에 이정희 한국외국어대 교수(정치학), 임성호 경희대 교수(정치학), 양건 한양대 교수(법학)도 연임제 개편 등 권력구조 논쟁에 동참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지역주의 해소에 도움이 되는데다, 영호남의 지역대결구도보다는 중앙과 지방, 도시와 농촌 등 다른 은폐된 지역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논의의 심화에 일단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의 지역주의에 대한 연구 경향에도 문제가 많다. 지역주의를 주제로 한 학술대회가 수 차례 열리고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 고문헌 검토와 설문 분석 등 다양한 경향의 관련 문헌이 고루 분포할만큼 양적으로는 커졌지만 질적으로는 여전히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이미 상당부분 무리가 있음이 밝혀진 사항을 연구내용에 포함시켜 얼굴을 붉히는가 하면 심지어는 실적을 올리기 위해 기존의 연구를 재탕삼탕하는, 민망한 사례도 허다하다. 여러 가지 분석과 진단은 난무해도 대안은 원론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김만흠 교수는 “‘지역주의는 망국병’이라는 식의 원론적 합의를 도출하거나 균열구조로 정당화하기보다는 이제는 사회통합의 차원에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할 때”라고 연구방향을 제안한다. 이제는 定置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우리 현실에 맞는 사회통합 방안을 제시하는 연구결과를 길어내야 할 시기인 것이다.
권진욱 기자 atom.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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