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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가라타니 고진, ‘종언’ 혹은 또 다른 기원
[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가라타니 고진, ‘종언’ 혹은 또 다른 기원
  • 구갑우 서평위원/ 북한대학원대·정치학
  • 승인 2010.05.10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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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갑우 서평위원/ 북한대학원대·정치학
나는 아직도 소설을 읽는다. 습관일 게다. 최근, 『부코스키가 간다』에서는 청년실업문제의 대안 없음을, 『재와 빨강』에서는 ‘쥐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초상을, 『아Q정전』에서는 노예의식에 대한 고전적 비판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을 얻을 수 있었다. 처음에 소설과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읽을 것을 찾던 시절, 지금은 인터넷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헌책방에서, 문학잡지를 사오던 친구 덕택에 손에 잡히는 데로 소설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 때가 ‘1980년’이었을 것이다. 그 뒤로 소설의 선택은 ‘지침’에 의한 것이었다. 세상을 발견하게 하는 ‘비평’과 ‘자연발생적인 삶의 총체성이 존재하지 않’는 현실임에도 ‘별이 빛나는 창공’과 ‘길의 지도’를 보여주고자 했던(루카치), ‘의식의 덩어리들’이 준 선물이 소설읽기였다.

『광장』, 『객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등의 고전은 물론 삶의 현장에 있고자 했던 소설과 시는, 교실 ‘밖’ 교과서의 역할을 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 개입하고자 하는 ‘현재시제의 실천’(백낙청)인 비평과 ‘함께’ 감성과 이성을 매개하는 상상력으로서의 정치적 역할을 하던 시절이 ‘1980년대’였다. 1980년대의 비평은 그 과거의 소설들을 불러왔고, 그 소설들의 상상력은 ‘여럿’을 ‘하나’로 묶었다. 가라타니 고진의 말처럼, 1980년대를 살았던 문학은 “(제도화된) 혁명정치보다 더 혁명적인 것을 가리”켰다. 또 다른 문학인 시, 1984년 『노동의 새벽』은 “문학은 영구혁명 중에 있는 사회의 주관성이다”는 명제를 그 때 그곳에서 실천하는 것처럼 보였다. 비평이, 보다 큰 범주로 지금 이곳의 문제에 비판적으로 개입하고자 하는 다양한 ‘산문’이, 예를 들어 한반도 국제정치를 천착하는 리영희의 산문이, 문학과 함께 하던 시절이었다. 문학과 산문(비평)이 ‘장교와 부사관(하사관)의 관계’(조영일)가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위한 조건이 되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비평과 문학을 ‘따로’ 읽는다. 비평에서, 문학에서, 나름의 총체성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있지만, 예를 들어 한반도의 분단과 신자유주의적 양극화를 연계하려는 시도가 나름 진행중이지만, 비평에 기초한 문학적 성취를 보기란 어렵다. 미학과 정치가 분리되는 것이 ‘진보’였고 따라서 우리 모두가 자유주의자였던 1990년대를 통과하면서 이 따로 읽음에 익숙해졌다. 즉 이성과 감성을 연결하는 지점을 잃/잊었다.

 

‘통일시대’ 또는 ‘6·15시대’를 논의하는 비평(백낙청, 한기욱)을 하나의 산문으로 읽을 뿐, 거기서 다시금 문학이 열 수 있는 ‘미학적인 것’에서 ‘정치적인 것’으로의 길(신형철)을 보여주는 작품을 찾지는 않는다. 문학과 정치 논의의 부활은, 문학은 ‘최종심급’에서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명제가 작동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인정으로 읽힌다. “이주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며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거나 지지 방문을 하고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논문을 쓸 수 있지만, 이상하게 그것을 시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진은영)는 한 시인의 고백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지적처럼 도덕적 과제로부터 자유롭게 돼 ‘그저 오락이’ 된 오래된 문학이 생존하는 이유를 추측하곤 한다. 이 실존은 비정치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새로운 비평에 기초한 것이다.

“‘문학’이 윤리적·지적인 과제를 짊어지기 때문에 영향력을 갖는 시대는 기본적으로 끝났”다는,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한 선고를 ‘다분히 일방적인 근대소설관’(백낙청)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폄하하기보다는, 비평을 써야 하는, 정치적이어야 하는, 절박한 이유를 찾지 못하는, 따라서 ‘청탁’이 있을 때만 비평을 쓰는 ‘제도화된’ ‘근대비평의 종언’(조영일)으로 읽는 방식에 동의한다면, 문학이 빈곤한 이유를 문학도 피할 수 없는 비평정신의 빈곤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무릇 종언은 새로운 기원을 잉태한다.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에서 역사의 부활로 간 이유는,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늦은 발견 때문이었다. 경제위기와 민주주의의 위기 속에서 근대적 의미의 국가건설 기획을 다시 불러올 정도다.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은, 여럿으로 전개되고 있는 자본주의와 국가의 문제에 맞서 여럿을 하나로 묶는 상상력의 부재에 대한 질문이다. 그 상상력이 반드시 문학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언명이다. 그것이 어떤 형태든, “이론과 실천 사이의 거리, 사유와 존재 사이의 거리에 대한 비판적 의식”(『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인 지금-여기서의 비평정신의 회복이야말로 문학이 짊어졌던 책무를 지속할 수 있는 원천일 것이다. 이 글도 청탁이라는 자본주의적 글생산 제도에 의한 것이지만, 비평을 쓰는 내면의 이유를 발견하려는 고투의 부재, 그것이 소설이 지속되지만 근대문학의 종언을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구갑우 서평위원/ 북한대학원대·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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