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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성사 속 탈식민·근대비판의 사상적 유산을 재평가하다
한국지성사 속 탈식민·근대비판의 사상적 유산을 재평가하다
  • 교수신문
  • 승인 2010.04.12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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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기획] 근대 백년 논쟁의 사람들

올해는 일제 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해다. 이를 맞아 <교수신문>은 지난 백년의 역사 속에서 ‘근대국민국가 만들기’에 나섰던 역사 속 인물을 재조명해 보았다. 일제하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근대국민 국가를 지향하는 동시에 근대 극복이란 이중 과제를 자신의 사상 안에서 포용했던 인물들이 그 대상이다.
경제학, 문학, 사회학, 역사학, 종교학, 정치학, 철학 분야에서 57명의 학자들이 인물 선정에 참여했다. 전공분야와 전체 학문분야에서 논쟁적으로 재해석 할 수 있는 인물들을 추천 받아 총 205명의 인물이 선정 대상에 올랐다. 그 중 3표 이상 추천이 이뤄진 인물 18명을 선정해 살펴본다. 이들의 면면을 통해 오늘날 논쟁적으로 재해석 할 부분은 없는지 점검할 것이다. 이번 기획을 발돋움 삼아 우리 근현대사의 지평이 좀 더 확장되길 기대한다.

● 조사대상 : 경제학, 문학, 사회학, 정치학, 종교학, 역사학, 철학 분야 연구자.
● 조사방법 : 전화 및 이메일 의견조사
● 조사기간 : 2010년 3월 27일(토)-4월 7일(수)
● 진행·분석 : 우주영 기자

이번 의견조사는 각 학문분야 총 57명의 학자들이 참여했다. 인물 선정은 각 학자들의 전공분야와 전체학문 분야로 나누어 추천을 받았다. 하나의 학문 안에도 다양한 분과 학문이 존재하는 만큼 학자들의 추천 인물은 실로 다양했다. 그 중 전체분야에서 가장 많은 득표수를 얻은 인물은 함석헌이었다. 그 밖에 3표 이상 추천을 받은 인물을 각 학문별로 따라가 본다.

함석헌(1901~1989)은 철학에서 4표, 종교학에서 1표, 전체분야에서 9표를 얻어 총 14표의 추천을 얻었다. 특히 한국 민주주의 확립에 그가 세운 공은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는 바였다. 이병수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교수는 “20세기 한국사상사를 동서양문명의 조우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때, 기존의 동서우월론을 배재하고 동서사상의 회통을 이룬 하나의 탁월한 사례다”고 추천의 이유를 밝혔다. 특히 지난 2008년 한국에서 열린 세계철학자대회는 함석헌의 씨알사상의 의미를 전 세계적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됐다. 다시 학문의 자유와 학자의 양심이 위협받는 현재, 그의 사상은 학계를 넘어 우리사회 전체에 큰 울림을 내고 있다.

경제학자들은 다양한 인물을 고르게 주목했다. 박현채(1934~1995)가 4표, 안병직(1936~)과 김성수(1891~1955)가 각각 3표씩 얻었다. 박현채는 민족경제론을 주창하여 이를 통해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가 대기업 중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석곤 상지대 교수(경제학)는 “신자유주의가 효율성을 강조한다면 민족경제론의 핵심은 형평성에 있다”며, “현재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해결할 방안 역시 민족경제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박정희 정권 당시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을 들어 박정희 정권을 비판했다. 이것은 박정희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 세력의 이론적 기반이 됐다. 그러나 1980년대를 거치며 안 교수는 식민지 근대화론자로 변신한다. 박이택 성균관대 연구교수는 “안병직은 한국 경제의 역사적 성취에 부합하는 한국 경제발전사를 모색했다”고 평하며, 더불어 “그의 사상 전환을 통해 한국의 보수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살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조사는 기존의 좌·우 이념 지향을 아울러 역사 속의 다양한 인물을 발굴해 재조명하는데 방점이 있다. 그렇다면 친일의 공과를 떠나 김성수를 다시 보자는 것이 박기주 성신여대 교수(경제학)의 주장이다. “김성수는 일제 식민통치 당시 우리가 약육강식의 세계질서 속에서 살아남는 길은 실력양성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경성방직을 설립해 자립경제와 민족자본 육성에 힘썼다.” 친일의 문제를 떠나 경제학 안에서 김성수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임화(1908~1953)는 총 6표를 얻어 문학에서 단연 으뜸이었다. 임화의 삶의 궤적은 해방공간의 사상적 진폭을 여실히 보여준다. 때문에 그의 삶을 체제 선택이란 협소한 틀에 가둬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이 소장 국문학자들 사이에 설득력을 얻게 됐다. 신덕룡 광주대 교수(국문학)는 “임화는 우리 근대문학의 출발과 나아갈 방향을 ‘신문학사’ 서술을 통해 구체화하고 고민했다”고 평했다.

함석헌 전체분야에서 가장 많은 득표

前 서울대 교수(사회학) 신용하(1937~) 백범학술원장은 사회학 분야에서 3표의 추천을 받았다. 신 원장은 사회학적 방법론으로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민족운동사 및 근현대 한국사상사를 복원해 사회과학의 토착화에 힘써온 국내 대표적인 사회학자이자 역사학자다. 김필동 충남대 교수(사회학)는 “역사학과 사회학을 소통, 접합했을 뿐 아니라 한국 사회학을 토착화 해 한국사회사를 근대 이후 시기까지 확장했다”고 평하며, “탁월한 독도연구 업적을 바탕으로 한 독도수호 운동도 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김영선 국학연구원 교수는 나혜석(1896~1948)을 가리켜 “한국의 첫 여성주의 이론가라 불러도 부족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것은 미술가와 문인으로 활동했던 나혜석이 사회학에서 많은 득표를 얻은 이유기도 하다. 그녀는 이혼과 관련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작품으로 평가되기 보단 선정적인 사생활만 대중적으로 소비돼 왔다. 김영선 교수는 “그녀는 조선의 여성들이 체험했던 이중의 억압과 이에 대한 여성주의적 통찰을 작품으로 표현했다. 그녀의 삶 자체가 가부장제적 결혼제도와 사회의 섹슈얼리티 통제에 대한 저항의 파편들”이라고 강조했다.

정치학자들은 前 서울대 교수 이용희(1917~1997)에게 표를 던졌다. 총 3표다. 한국국제정치학계에서 아직 그의 저서 『일반국제정치학(상)』(박영사, 1962)에 비견되는 저서가 없을 정도다. 해방 직후 국제정치와 관련 국내의 척박한 지적 풍토에서 ‘장소의 논리’에 기반을 둔 그의 국제정치학은 서양의 국제정치학을 훨씬 앞서는 것이라 평가 받는다. 최근 정치학계에서 그의 이론을 주목하는 기운이 싹트고 있다. 하영선 서울대 교수(외교학)는 “이용희 교수는 여전히 통일의 과제가 남아있는 한반도가 새로운 세계질서 안에서 지난 역사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도록 ‘전진민족주의’ 추진을 강조했다. 저항민족주의와 무분별한 국제주의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그의 국제정치학은 이론과 현실 양면에서 본격적인 재조명을 요한다”고 제시한다. 특히 이용희 교수는 이동주란 이름으로 미술사학자로서도 많은 저서를 남겼다. 예술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의 전통미술의 독자성을 밝힌 그의 삶은 여전히 많은 재해석을 필요로 한다.

신채호(1880~1936)는 총 10표로 역사학에서 최다 득표를 얻었을 뿐 아니라 전체 인물 중에서도 함석헌 다음이었다. 높은 득표수만큼 다양한 평가가 뒤따랐다. 식민사학을 극복하고 민족사학을 제창한 선구자적 업적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그의 민족주의 사관이 가진 오류와 비분강개함에 대해서는 지적이 이어졌다. 도면회 대전대 교수(사학)는 “신채호는 대한제국기 국가 중심의 역사학을 민족중심의 역사학으로 전환하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왔다. 1920년대 이후엔 아나키스트운동으로 전신해 혁명의 주체를 민족에서 무산대중으로 전환시켰다”고 평했다.

신복룡 건국대 교수(정치외교학)는 “그의 민족의식이 당시 민족운동의 사상적 동력이 된 것은 분명하나 그의 민족 관념이 지나치게 고유성을 강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것은 결국 민족을 세계로부터 고립시키게 된다. 또한 그의 사상이 인류의 공통성이나 세계성을 띈 종교, 사상까지 아우르지 못한 것도 아쉽다”며, 신채호 사상에 대한 다각적인 검토가 더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종홍과 하기락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철학 분야에서는 총 7명의 인물이 선정됐다. 박종홍(1903~1976)이 총 8표로 최다 득표를 얻었다. 이어 신남철(1907~1958)과 박은식(1859~1925)이 각각 7표와 5표를 얻어 뒤를 이었다. 박종홍에 대한 평가는 서양의 철학사상을 우리나라에 소개해 한국 사상연구를 체계화했다는 것으로 모아진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 아래서 안호상과 함께 국민교육헌장을 만드는 등 철학을 국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용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그가 유신체제를 정당화하는데 참여한 이유를 공론화 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최근 박종홍의 철학적 모순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그가 체득한 유학철학의 中和가 형이상학적인 숙명론으로 이어져 기득권 지배체제를 옹호하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것이 비판의 핵심이다. 철학분야에서만 3표를 받은 하기락(1912~1997)은 새로운 정치조직 사회당을 출범시키고자 했지만 실패한 인물이다. 박종홍의 행보와 사뭇 다른 모습이다. 한국 근대철학의 상징적 인물인 박종홍과 한국의 독보적인 아나키스트 하기락의 각기 다른 행보. 그 자체가 한국 철학계 전반이 극복해야 할 과제를 시사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논쟁을 예상해본다.

우주영 기자 realcosmos@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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