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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계 풍경] : ‘이응노 대나무 그림전’
[예술계 풍경] : ‘이응노 대나무 그림전’
  • 전미영 기자
  • 승인 2002.04.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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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4-17 14:37:20

동양의 정신과 화법을 서구 화단에 깊이 뿌리내린 세계적 화가 고암 이응노의 대나무 그림전이 6월 5일까지 서울 평창동 이응노 미술관에서 열린다. 풍경, 인물, 동물, 추상에까지 고루 닿아있는 그의 그림의 뿌리는 동양정신. 이응노 그림의 처음과 끝을 잇는 매개는 다름 아닌 대나무였다. 이응노의 그림이 세상과 만난 것은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에 ‘晴竹’이 입선하면서부터. 대나무와 그의 인연은 1989년 세계의 모든 예술가들이 마지막 육신을 누이고 싶어하는 파리의 ‘페르 라 세즈’ 묘지에 묻히는 순간까지 계속됐다.

그가 대나무에 쏟은 사랑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첫 입선 후 7년 동안 오직 대나무 그리만 그렸다든지, 1975년 그린 대나무 그림에 ‘애죽심위예술지본’(대나무를 사랑하는 마음이 예술의 근본이 된다)고 썼다든지 하는 일화로 잘 알 수 있다. 1958년 프랑스로 건너간 이후 서구 조형언어를 흡수한 이른 바 ‘문자추상’ 분야를 개척하며 화풍을 바꿔 가는 동안에도 그는 평생 집에 대나무를 심고, 대나무 그림만은 놓지 않고 그렸다고 한다.

이번 전시가 각별한 까닭은 세계적 화가라는 명성 뒤에 드리워진 인간 이응노의 고난의 역사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옥에 갇혔던 2년 반 동안 화가는 비로소 영혼의 날개가 잘린 예술가의 참혹한 비애를 깨닫는다.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죽음과도 같다. 나는 옥중에서도 작업을 계속했다. 형무소 뜰에서 녹슨 못을 주웠다가 알루미늄 세면기와 식기에 있는 대로 구멍을 뚫기도 하고, 가슴 밑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조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감옥에서 그가 찾아낸 그림재료는 간장과 된장, 화장지와 밥풀이었다. 예술과 현실, 인간의 실존과 작품이 결코 유리될 수 없다는 의식을 뚜렷이 갖게 된 감옥 생활은, 이응노의 예술 지평을 한층 넓혔다는 점에서 참으로 역설적이다. 끼니때마다 조금씩 떼어낸 밥풀을 뭉쳐 만들어낸 인간 군상, 도시락의 종이를 뜯어 간장으로 찍어낸 수묵화가 더없이 아름다우면서 참혹하게 고독한 까닭은 그 때문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서대문교도소에서 그린 작품 등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의 대나무 그림 63점이 선보인다. 비바람에 쓸리면서도 살아서 꿈틀대는 댓잎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끝내 조국에 돌아오지 못한 노화가에게 대나무가 어떤 의미였는지 비로소 알 듯하다.
전미영 기자 neruda73@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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