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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 유관순 누님이 두 번 통곡한 이유
[문화비평] : 유관순 누님이 두 번 통곡한 이유
  • 김민수 디자인문화비평
  • 승인 2002.04.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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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4-19 10:06:25

김민수/디자인문화비평 편집인·전 서울대 미대 교수

위의 '누님'은 서정주가 읊었던 그 누님이 아니다. 그의 누님은 일본군 자살특공대 마쓰이 오장의 전사를 애도하는 시를 쓰고 돌아와, '국화 옆에서' 거울 앞에 잠시 서 있었다. 그리곤 무고한 시민을 대량 학살한 독재자마저도 찬양하기 위해 몸을 바쳤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픈 누님은 어릴 적 매년 삼월마다 선생님과 함께 불렀던 노래 속의 그분이다. “삼월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사월 하늘 아래 봄이 왔나 싶은 요즘, 최악의 황사가 을씨년스런 삼월을 붙잡는다. 황사로 뒤덮인 하늘을 바라보면 이런 말이 생각난다. “가난한 유관순보다 부자 마돈나가 좋다!” 얼마 전 젊은 유곽여성들의 실태를 심층 취재한 TV방송에서 어떤 여성이 했던 말이다. 그녀의 말은 유곽여성 혼자만의 생각이 결코 아닐게다. 사회의 가치관과 세태를 말해주는 한 예일 뿐이다. 우리는 ‘세계 1위 초고속 인터넷 사용국’답게 오직 외모, 돈, 권력만을 향해 광속으로 질주하고 있지 않은가.

대체 사람들이 떠올리는 ‘유관순 이미지’는 어디서 온 것인가. 아마 죄수복을 입고 있는 열사의 사진이 아닌가 싶다. 교과서나 각종 자료에 나오는 1919년 서대문감옥 수형 기록부에 붙어있던 사진 말이다. 사진 속 누님의 얼굴은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 일제의 고문으로 얼굴이 ‘퉁퉁’ 부어 올라 있기 때문이다. 미인이 되기 위해 성형수술 마다않는 인간들이 소위 ‘견적 많이 나올’ 이런 얼굴을 좋아할 리 없다. 허나 누님의 본모습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적어도 3.1운동으로 이화학당이 폐쇄되기 전, 학우들과 찍은 사진까지는. 원래는 갸름하고 청순한 얼굴형이었다. 세상은 왜 이런 누님을 욕되게 하는가. “마돈나가 더 좋다”는 세태 때문만은 아니다.

충남 옥천의 유관순 기념관에 가면, 추모각에 1986년 광복절에 봉안된 유 열사 영정이 있다. 모르는 사람들은 앉아 있는 영정을 보며 숙연해질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영정 앞에서 유 열사의 혼백이 두 번 통곡하는 소리를 듣는다. 누님은 말한다. “내 얼굴 돌려줘!” 온갖 폭행과 고문으로 살해하고,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힌 무덤마저도 말살한 일제의 ‘죄수 사진’으로 영정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또 누님은 오열한다. “누가 나를 친일화가의 손으로 그려달라고 했니?” 영정을 그린 화가는 월전 장우성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알려진 친일미술가 50여명 중 한사람”이며, 서울대학교 미대 교수까지 지낸 인물로 학계에 알려져 있다. 장우성은 누님의 얼굴을 일제의 죄수사진보다 더 부어 올라 나이든 모습으로 왜곡시켜 놓았다. 마음가는 곳에 붓 따라 가는 법. 사람들은 독립을 위해 순국한 누님을 기린다며 매년 10월 12일 이 영정 앞에 모여 추모제를 지낸다. 이 꼴을 보며 누님이 말한다. “더 능욕하지 말라. 해방된 것은 너희가 아니라 친일파들이다. 이 얼빠진 것들아!”

해방 후 우리는 친일파 단죄 한번 못하고 일제잔재가 뿌리 박힌 문화 속에 살고 있다. 프랑스는 전후에 친나치 부역자들을 철저히 단죄해 역사의 교훈을 남겼다. 반면 우리는 친일파들이 이승만 정권의 비호 아래 ‘반민특위’를 해체시키고, 사회의 모든 권력을 장악해 버렸다. 이 결과 문화예술계에서도 마치 SF영화 ‘에일리언’ 시리즈처럼 끈질긴 ‘식민의 알까기’가 계속되었다. 영화에서 에일리언은 1편의 어미가 사라져도 4편에 이르기까지 인간 몸을 숙주 삼아 계속 복제한다. 마찬가지로 해방 후 미술촵디자인계에서 친일파들은 후진들의 눈과 마음에 식민미학을 확대 재생산해왔다. 예컨대 1988년 오륜기에서 햇살이 뻗어 나오는 서울올림픽의 공식포스터. 이는 대동아 전쟁 때 욱일승천기(태양기)를 화두 삼아 전후 일본 현대 그래픽디자인계를 이끈 일본의 대부를 흠모한 결과였다. 일본식 도안기법으로 오천년 역사와 문화의 향기를 말살시킨 ‘호돌이.’ 전후 일본 만화가 요코하마 미쓰데루 원작의 ‘요술공주 새리’와 ‘밍키’에서 본듯한 서울경찰청 ‘포돌이’와 ‘포순이’의 이상한 눈알 등등. 모두가 눈뜨고 보고 싶지 않은 일제잔재의 황사들이다.

올 3.1절을 기해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에서 친일파 명단을 발표한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다. 하지만 명단 속에 포함된 미술계 인사는 고작 두 명밖에 없었다.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일제잔재 청산은 미래로 가는 길목에 장애가 되는 해묵은 걸림돌이 아니다. ‘21세기 문화전쟁’의 핵심어, ‘문화적 정체성’을 찾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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