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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秘史-최찬식의 청구대학 증언]25. 식민지에서 해방 조국으로 … 몸에 밴 한국적 미덕과 교육관
[대학 秘史-최찬식의 청구대학 증언]25. 식민지에서 해방 조국으로 … 몸에 밴 한국적 미덕과 교육관
  • 교수신문
  • 승인 2009.12.30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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植民地 朝鮮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日本에서 나오실 때 한 손에는 바이올린’을, 한 손에는 無政府主義 책구러미를 들고 오셨다. 바이올린 은 멀지않아 전당포로 갔고, 책들은 무슨 警告가 있을 때 마다 어디 숨기거나, 아궁이속에 빨리 집어 넣어야 할 어머니의 애물단지가 되었다.  당시에는 中學生이 요새 大學生쯤이나 人口比例도 적었거니와 知識에 있었어도 그들에 맞먹을 만큼 早熟했다. 社會思想에 일쯕 눈을 뜬 것은 亡國靑年들의 宿命이었다고도 할까. 마츰 日本은 소위 “大正(昭和以前 年號) 데모크라시” 를 누릴 때에, “圓本” 이라고 一圓均一로 普及版 책을 많이 찍어낼 때라 讀書慾 을 채우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하셨다. Kropotkin, Bakunin, Proudhon 은 물론, Bergson, Romain Rolland 등 당시 西歐의 最新思想에도 接하셨다. 日本著者로는 幸德秋水, 大森榮등은 내가 어릴 때부터 귀에 익히 듣던 이름이다.  어찌해서 그 당시 共産主義가 아니고  아나키슴 쪽으로 기울게 되었는지 그 動機에 대해서는 끝내 엿줘 보질 못했는데, 내가 나중에 생각해도 敎條主義的인 共産主義가 아니라 ‘自由人의 聯合’을 標榜(표방)하는 이 陣營을 택하신 것은 多幸이었다 생각한다. 아나키슴의 鼻祖로 老子를 드는 사람도 있다. 위에 말한 日本 아나키스트 들은 天皇制에 反抗할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 安重根 義士를 尊敬한 사람들이었다. 當時 社會思想과 맞물린 抗日은 그저 民族主義이라기 보담 國際的이었다.  創氏改名 같은 말은 一和公 의 집안에서는 입밖에 낼 가치조차 없는 말이었다. 큰 집안에서 혹 당시의 公務員으로 就職한 분이 할아버지를 뵈러 큰집에 올 때는 門밖에서 名札을 떼고 들어왔다(日帝末期에는 學生, 公務員들은 名札을 가슴에 달고 다녀야 했고, 公務員이 되면 사실 創氏改名에 고집스레 抵抗하기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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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歸國後 20代 也靑은 植民地의 精神的인 우울에 더하여, 窮乏속에서 鬪病에 시달리던 時期였다. 나중에 자기 生涯에 대한 辯明을 하실 때에는 곧잘 친구 尹又烈의 “虛無黨 宣言“ 을 말씀하셨다.  거기에 同時代의 敏感한 靑年들이 共有한 感情이 反映되어 있다는 것이다. 日帝下 우리 先人들의 숨막히는 心情을 理解하는데 도움이 되지않을까 싶어,  여기에  그 內容의 一端을 紹介한다.  1926年 1月 5日 東亞日報는 ”.....昨4日 오전 虛無黨宣言이란 秘密出版物이 市內각지에 배포되었는데 內容이 前例없이 過激한 文句로.....各署 高等係가...大活動이나 아직 眞相未詳“이라 보도했다(朝鮮無政府主義運動史編纂委員會: <아나키즘 運動史(前篇)>p195).

 <虛無黨宣言>을 抄錄하면,
 “.....直接行動을 주장하는 虛無黨은 奮起하였다. 目下 朝鮮은 二重, 三重으로 포악한 敵 의 迫害를 받고, 一步 前進하기도 不能한, 최후의 비참한 絶頂에 서 있다. 二千萬 生靈은.....難境에서 방황하고,....民衆의 現 社會에 대한 咀呪(저주)는 衝天한다.....우리는 希望도 理想도 將來도 아무것도 없고, 포악한 敵 의 搾取와 虐待와, 殺戮과, 嘲笑와 侮辱이 있을 뿐.....現狀을 타파치 못하면 朝鮮은 영원히 멸망할 것이다.....이 戰慄할 光景을 ?過할 수 없다. 革命의 烽火를 點하자. 破壞의 義劍을 빼자! 義憤이 있고, 血氣가 있는 者는 奮起할 때가 왔다......포악한 敵에게 宣戰을 布告하자......蛇蝎(사갈)과 같은 政治, 法律 및 一切 權力을 파괴하자!..... 方法은 直接行動이 있을 뿐, 革命은 결코 言語와 文字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合法的으로 現秩序內에서 革命의 可能性을 믿는 者 있다면, 그는 低能兒다...... 革命당시의 러시아 虛無黨의 行動을 본받지 않으면 안된다.....朝鮮人이 받는 虐待와 悲哀를 感知하는 者 라면 누구라도 虛無黨의 主張과 一致할 것을 확신한다. 虛無黨의 主張을 반대하는 者는 民衆의 敵이다......신음하는 民衆들이여, 虛無黨의 깃발 아래 모이자! 저 잔인하고, 포악한 敵을 一擧에 격파하자. 最後의 勝利는 우리의 것이다. 虛無黨 萬歲! 朝鮮革命萬歲!”(前揭書 pp 196-197, 原資料: 文敎部 國史編纂委員會 “朝鮮獨立運動史” 第四卷)

 前揭書를 執筆한 河岐洛敎授는 그 發想內容이나, 表現文體에 있어서 申采浩의 <朝鮮革命宣言>을 닮아있으나, 차분한 論理의 展開보다 격양된 語調로 血氣를 吐露함에 그치고 있다고 評했는데, 首肯이 간다. 그러나 어찌됐던간에 1920年代의 朝鮮靑年들의 絶望的인 絶叫를 記錄한 文獻이다. ‘30年代初부터 日本은 소위 15年 戰爭時代에 접어들고, 國內의 抵抗運動은 이러한 絶叫의 吐露조차 불가능하게 되어, 地下에 潛伏한다. 한편, 거센 彈壓이 朝鮮의 一部 知識人들을 變節로 무너지게 하기도 했다.  也靑은 歸國하여 日本 早稻田 大學 講義錄을 받아 보고, Esperanto 를 배우고, 眞友聯盟(無政府主義)에 加入하고, 讀書會에 나가고, “農本” 發刊에 참여했으나, 이것을 可能케 한 것은 自手成家하신 千石꾼 地主 丈人어른의 덕택이었으니, 이 運命의 아이러니‘ 인가.  日本에 계실 때는 妻兄이 돈 十圓(그때 돈으로는 큰 돈이었다)을 부쳐 온 것을 돌려 보낸 傲氣의 靑年 也靑이었으니 말이다. 내가 어릴 때 본 光景은, 眞友聯盟 同志들이 한 방 들어 앉아 담배를 피워대면 연기가 무슨 工場같이 자욱한데, 결국은 어머니께서 밥床을 채려 들여놓으시곤 했다. 無産階級을 위하여 社會를 뒤엎어버리겠다고 나선 젊은 鬪士들은 필경 地主의 향응을 받고 있은 셈이다.

 어머니도 소가 뒷걸음치다가 쥐잡는 격으로 抗日에피소드 를 남기셨다. 日帝下 동내 班長이 神社參拜에 깃대 들 차레라고 깃대를 우리 집으로 가져왔는데, 마루위에 놓는 것을 어머니께서는 마당에 내동갱이 쳐버린 것이다. 神社參拜 그 자체에도 拒否感이 있었겠지마는, 어머니의 反應은 우선 대나무 작대기를 마루위에 놓는 것이 不淨탄다는 것이다 -- 대나무는 喪家에서 지팡이로 쓰는 물건이기 때문에.  이걸 班長이 警察署에 가 일르는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하나의 抗日事件이 된 것이다. 警察署에 불려 가서 조사를 받았는데, 어떻게 대답을 하셨는지, 擔當刑事는 되뢰 班長을 꾸짔고 無事히 放免이 되었다. 그 刑事가 그래도 속이 있는 朝鮮사람이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그저 厚 한 사람이었는지는 모르되, 밖에서 기다리던 也靑은 顔色이 白紙같이 하얗더라고 어머니는 回顧하셨다. 만약에 일이 잘못되어 저쪽에서 캐기 시작했더라면, 감자 넝쿨같이 꼬리를 물고 퍼져나갈 事緣이 있는 것을 이쪽은 너무나 잘 아는데, 多幸히 저 쪽은 모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머니의 意識도 맹탕은 아니었다. 당시 다른  집안에서 女息아이를 무슨 “子 야”고 부르는 것을 들으시고는 相을 찌푸리시는 것을 보았다. “...子”는 소위 創氏改名한 日本風이름이다. 그런데 이 日本흔적은 지금까지 살아남아, 이제는 그 由來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으니, 우리 社會의 이런 精神狀態를 뭐라고 해야할 것인가. 

 1934年부터는 外叔 徐相日先生, 尹相泰先生들이 設立한 慶北商工株式會社에 다니시면서  ‘45年 解放을 맞이 하셨다. 東庵 徐相日先生은 後日 大衆黨을 創黨하시어 黨首를 하시고, 그 以前에 大韓民國의 制憲委員이시기도 하다. 季氏 徐相漢先生은 英親王의 日本皇族과의 結婚을 反對하여 爆彈未遂事件을 일으킨 主謀者로 抗日歷史에 이름을 남기신 분이다.

解放과 人間 
 
 行年 41歲에 乙酉年 解放을 만난 也靑의 行動을 이끈 것은 오직 잃어버린 靑春을 挽回하구싶은 一念이었다고 告白하신 적이 있다. 靑年들과 같이 일하는 것을 좋아하시니,  周邊에는 항상 靑年들이 따랐다. 治安維持會 財務部次長, 慶北道顧問室, 自由社會建設者大會, 慶北新聞 編輯局長, 獨立促成慶北靑年聯盟委員長, 罹災民自治會 設立, 反託運動등 歷任또는 參與하시다가, 臨時政府 國務員으로 歸國하신 柳林先生이 아나키스트 勢力을 糾合하여 獨立勞農黨을 創黨하실 때는 中央常任委員과 慶北支部長을 맡으셨다. 1947年에는 朔望會로 因하여 大邱時報社 社長 張仁煥 先生과의 運命의 만남이 있었고, 意氣投合하여 時報社에 ‘獨立運動局’이란 看板을 내 걸어 局長에 就任하시고, 마침내 大衆學術講座를 마련하게 된 事緣은 앞에서 이야기 한 바다. ‘50年代初, 高炳幹 先生의 主導下에 慶北大學校 가 設立될 때는 財政委員長, 副委員長을 맡으셨다. 2006年 12月에 大邱市에서 發刊한 <大邱의 文化人物>이란 책에 也靑篇이 收錄되어있다.

 위에서 말한 바 와 같이 也靑은 中學 卒業狀도 없으시다. 그러면서 大學을 創設하시고, 經營하시면서 大學 나온 사람들에게 주눅이라곤 느껴본 일이 없으신 같이 보였다. 거기에는 儒敎의 밑바탕이 있었고, 더 중요하게는 자기나름대로 新時代의 思想中에도 最尖端을 맛보았다는 自負心이 있은 까닭이 아닐까 생각한다. 세상과 事物을 보는데 “眼目”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人生의 根本精神에는 “옳게 터득한 儒敎精神”은 아직도 有效한 것 같다. 여기에 西洋의 過激思想으로 社會組織을 꿰 뚤러 보는 눈을 가졌으니, 어만한 大學 卒業쭘은 眼下로 보인 것 같다. 成人敎育을 시작할 때, “그때 그 당시 나 만큼이라도 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나섰다” 고 당당히 말하셨다. 過激思想은 그대로 實現하려고 드는데 問題는 있지마는 그런 思想은 그것대로 事物을 理解하는데 價値가 있다(heuristic value). "옳게 터득한“ 이라고 했는데, 東洋의 全人的인, 統體的 人生觀, 世界觀은 지금 西洋에서는 大學院에서 겨우 接觸하는 斬新한 哲學이 되어 있다. 人文學으로 말하면, 全敎育課程이 人生이나 事物에 대한 옳은 ”眼目“을 기르는 課程이 아닐까. 也靑과 같이 구라파를 巡遊할 때, 빠리 의 지하철 車 안에 수프 광고가 붙어 있는데, 소 몸둥아리를 半을 짤라 논 그림이었다. 소 머리와, 앞 다리는 있는데 등과 배는 半틈 까지만 짤라서 그려 놓은 것이다. 也靑은 이것을 보고 몹시 못마땅히 여기셨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글씨 쓰는 것을 가르칠 때도 획을 다 쓰지 않고 途中에 그만 두는 것은 大忌였다. 무엇이든 온전해야하는 것이다. 하물며 生命體를 그리면서.....! 이 部分的이고 破片的인 接近方法은 넓게 말해서, 現代西洋, 지금은 全世界文明의 一端을 示唆(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도 也靑의 反應에 同感했다.

 大學의 存續문제가 認可문제에 集約되었을 때, 也靑은 認可를 따내는 날에는 그걸 學生들 머리위에 던져주고 그만 둘 생각까지 했다고 우리는 봤는데(5章-5節), 공부보담 그런 것에 더 神經이 쏠리는 學生들의 態度가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學生들이 資格證이나 看板에 關心을 갖는 것을 나무랄 수도 없는 일이지마는,  敎育者로서 也靑의 그런 순수한 心境을 理解할 만도 하다. 也靑이 大學卒業看板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은데는, 身邊에 日帝時代 京城帝國大學을 나온 동생이 있었고,  大學을 갖 마친 자기 아들(즉 나)이
있었다는 것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삼촌이 帝國大學을 가게 된 것은 그의 父君, 一和公에 알리지않고 入學應試를 한데서 비롯됐다. 一和公은 合格이 되고야 申告를 받고, 日記에 이게 좋은 일인지, 나뿐 일인지 분간을 못하고 있는데, 찾아 온 손님들이 모두 그게 좋은 일이라고들 해샀는다고 적고 계신 것을 보았다.  여하튼, 한 여름 也靑이 療養次 가 있는 桐華寺절에 동생이 와서 試驗공부를 하더니, 그 이듬해 봄 대번에 城大豫科에 붙었다고, 재주있는 동생을 칭찬하고, 또 아끼셨다.

 내가 小學校 卒業이 가까워졌을 때 擔任先生이 學父兄 한번식 와다녀 가시라고 班全體에 명령을 해서, 생전 學校에 오신 일이 없는 也靑이 처음으로 學校에 나오셔서 우리 先生을 만나고, 學父兄 구실을 했다. 이튿날 그 日本先生은 날 보고 “네 아버님은 俊才이셔” 했다. 검은 두루마기에 中折帽子를 쓰고 나타난 그 30代 朝鮮人에게 유창한 日本말 말고 또 무엇을 보았는지.....잿속에 불씨가 감춰 있듯, 가슴 속의 反日, 反社會의 꼬갱이를  그가 알 理는 없다.  어쨌든, 나는 “當然하지,” 여기기도 하고, 가슴이 뿌둣하기도 했다. 大抵 자기 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이라 생각하는 것은 一般的 兒童心理가 아니겠는가마는, 실지로 이런 말을 듣는 例 또한 보통은 아니다.  그 日本先生 또한 凡庸한 小學訓導가 아니었다. 장차 大學에 進學할 목적으로 그도 자기 공부를 하고 있었다. 어떤 때는 자기 공부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自習時間을 주어, 後日 卒業하고 난 뒤 여기 대하여 미안했다고 하셨지마는, 나는 오히려 그런 先生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 우리 先生님은 凡庸한 小學訓導와는 다르다고.  敎育은 꼭 무엇을 가르치는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 자기 됨됨을 그저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充分하다. 그 先生은 日本人이기는 했으나, 그리고 우리에게 日本魂을 가르쳤지, 朝鮮魂을 말한 적은 없었지마는, 그래도 남의 땅에 와서 一旦 남의 文化를 尊重할 줄은 아는 사람이었다. 擔任이 되어 첫 點呼을 할 때, 내 이름을 부르고 나서, “祖上이 崔致遠 先生이구만,“ 한 마디 할 때부터 나하고는 마음이 통했다. 처음 盈德 시골에 赴任했는데, 學父兄 村老들이 漢文으로 편지를 보내사서 잘 읽지를 못했다고, 敬意를 담아 얘기 하곤했다.

 也靑은 原來 韓服을 즐겨 입으셨다. 이것은 國粹主義라기보담, 몸에 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洋服을 두고 늘 ‘그 총대 같은 바지 가랭이’ 라 하셨다.  그리고 우리집의 밥은 白飯이 아니라 항상 보리 섞은 밥이었고, 고기 국에서는 꼭 위에 뜬 기름을 除去하고 먹을 것을 가르치셨다. 반찬이 없더라도 서른 번 씹으면 맛이 난다는등,  모두 지금 와서는 社會一般의 認定을 받고 있는 健康食法이다. (同時代를 살은 어느 분의 傳記中 遺族이 回顧하는 대목에서 그 분도 밥을 오래 씹도록 가르치셨다니, 이것은 當時 開明한 中産層 家庭이 共有한 家訓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儒敎에서는 靈과 肉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래서 舊時代의 讀書人의 知識範圍에는 養生法도 포함되어 있다. 退溪先生에게도 “活人心方”이란 著書가 있는데, 揷畵를 넣어가면서 體操法을 說明하고 계신다. 也靑도 매일 아침 그런 體操를 하시고, 위에 말한 理由로 우리 집에는 簡易藥房만큼이나 藥欌과 작두등 具色을 갖추고 있었다. 日常 處方은 也靑이 直接 하시고 乾材를 사 와서 自給自足했다.  伯父님이 漢醫師이셨기 때문에 必要하면 그기서 方文을 얻어 오기도 했다.

 자식들 敎育에 가서는 철저히 敎科書 밖에 모르셨다. 다른 아이들이 問題解答集, 參考書등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어쩐지 그런 것을 가지는 것은 劣等生이나 하는 것인양 여겼으니, 일쯕부터 그런식으로 洗腦를 당한 것 같다. 當時 一次 試驗 公立校, 慶北中學에 떨어지고 二次試驗校인 啓聖中學校에 들어갔는데, 어느 날, 아버지는 아무게 헌책방에 가면 네가 쓸 敎科書를 묶어놨으니 가지고 오너라 하셨다. 가보니 果然 一學年에서 배울 敎科書 한 꾸러미가 기다리고 있었다. 學年이 바뀐 아이에게 새 책의 잉크냄새는 그렇게 신나는 법인데... 하물며 새로 學校를 시작하는데....., 그 즐거움을 박탈당하고 나는 좀 서운하기도 했지마는, 어느새 이렇게 우리가 쓸 敎科書를 조사해서 마련해 놓으셨나, 感歎도 했다. 學校마다 敎科書도 조금식 다른데 말이다.  (慶北中學은 옛 大邱高普의 後身이다. 어머니는 네 아버지가 쫏겨난 곳인데 너를 받아주겠나, 하셨는데 이 것이 과연 사실인지 與否는 모르되, 위에서 말한 先生이 受驗生을 불러 놓고 압앞이 注意를 주면서, 내게는 “너는 해 줄 말이 없다”고 믿으신 것은 사실이다. 나는 훗날에야  公立이 아니고 私立學校에 다닌 것이 多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서는 朝鮮人 敎師가 多數여서, 少數派 日本敎師는 氣를 못 피고, 軍國主義 日本의 옥죄임이 덜 미쳤다. 同門先輩中에는 玄濟明, 朴泰俊, 朴木月 先生들이 계신다.) 啓聖에서 普成專門으로 進學했는데(一次의 城大豫科는 學科에는 붙었으니 그것으로 滿足하고), 이렇게 日帝下 民族學校만 다닌 것도 내 生에 意味있는 運命이었다고 생각한다 -- 그러나 내가 겪은 이 民族學校에 대하여 할 말도 多少있지마는.  普成專門이 解放前夜 우리 民族 內面의 縮小版이라고 본다면, 그 學校에 대하여 할 말은 바로 우리 民族에 對한 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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