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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들이 만들어 쓰는 아이디는]전공 쓰거나 이름 쓰거나 … 반짝이는 상징들
[교수들이 만들어 쓰는 아이디는]전공 쓰거나 이름 쓰거나 … 반짝이는 상징들
  • 김유정 기자
  • 승인 2009.12.29 14: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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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는 ‘내 자신’이다. 그것은 나의 이름이 될 수도, 나의 직업이 될 수도, 나의 평소 생각이 될 수도 있다. 단어 그대로가 말 해주듯 아이디는 나의 정체성을 다 보여줄 순 없어도 그 일부임엔 분명하다.
교수들에겐 자신의 학문세계가 곧 아이디이기도 하다. 상당수 교수가 각자의 전공·학문분야에서 쓰이는 다양한 요소를 활용해 이메일 아이디를 만들어 쓰고 있다. 사소한 궁금증에서 시작한 ‘재밌는 아이디 찾기’는 교수사회를 한층 가깝게 들여다볼 수 있는 의외의 기회였다. 교수들은 아이디를 어떻게 만들어 쓰고 있을까. 

대학 총장들의 명함엔 ‘president’ 혹은 ‘presid’라는 아이디가 주로 적혀 있다. 공적인 자리에서 활용하는 명함에 아이디 형식도 뒤따라간다. 반면 총장이 되기 전 교수로서 사용하던 아이디는 조금 다르다. 박 철 한국외대 총장은 ‘parkchul’을, 이종욱 서강대 총장은 ‘leejw’를 사용했다. 

일러스트 : 이재열

역시 가장 보편적인 방식은 이름을 활용하는 것이다. ‘김유정’을 예로 들면 kyj, yjk, yjkim 등으로 아이디를 만든다. 간단하고 입력하기 쉽기 때문에 많이들 사용 하지만, 동명이인 여부를 구분하기 힘들고 무엇보다 개성이 없어 아쉽다. 

영어로 성·이름을 압축하는 방법에서 벗어나 약간의 응용을 더하면 기억하기 쉬운 아이디로 변신한다. ‘leezee’(이봉재 서울산업대 교양학부), ‘pung10’(김풍기 강원대 국어교육과), ‘sue1218’(이일수 용인대 영어과)처럼 활용하는 식이다. 황규호 이화여대 교무처장(교육학과)이 사용하는  ‘faculty’처럼 자신의 직책을 그대로 보여주기도 한다.  이름을 표현하는 방법이 영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쉽게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이런 아이디를 생각해 냈다”는 이재하 경성대 교수(중어중문학과)의 이메일 주소는 ‘l2228’로 시작한다.

알파벳 소문자 ‘l’에 ‘2228’이란 숫자가 이름과 얼핏 비슷한 모양이다. 
전공 정체성을 보여주는 아이디는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다. 박정원 상지대 부총장(경제학과)의  아이디는 이코노믹스(economics), 민동준 연세대 교수(신소재공학과)는 케미컬(chemical)이다. 사진이 갖고 있는 힘을 믿는 것일까, 양종훈 상명대 홍보처장(영상학부)은 ‘photopower’를 아이디로 쓴다. 양 처장은 얼마 전 시각장애인을 위한 사진교과서를 출간하며 그가 생각하는 사진의 힘을 보여줬다.

임상우 서강대 문학부학장(사학전공)은 ‘clio4korea’란 아이디를 사용한다. 클리오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역사의 신이다. 임 교수는 “역사학회 총무를 맡던 시절, 학회를 상징할 수 있는 아이디를 찾다가 만들었다”며 “총무일이 끝난 지금은 개인 이메일 아이디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숫자 ‘4’는 영어 ‘for’로 변용해 읽는다. 한국을 위한 역사학회를 상징하는 아이디가 지금은 한국을 위한 역사학자가 되고픈 임 교수의 바람을 보여주는 듯하다. 박상익 우석대 교수(역사교육과)도 아이디로 ‘clio53’을 써서 전공 정체성을 표현했다.

독특한 아이디를 만들게 된 재밌는 사연도 있다. 이현우 한림대 연구교수(노문학)가 전공분야를 활용해 아이디를 만든 이유는 “이름을 써서 만들려니 이미 있는 아이디가 하도 많아서”였다. 이 교수의 아이디는 ‘mramor’인데, 러시아어로 대리석이란 뜻이다. “대리석은 러시아 희곡 작가 브로드스키의 작품으로, 대학원에서 강의를 할 때 교재로 사용했다. 이메일 계정을 만들 당시 마침 책이 옆에 있었다.” 사용하다보니 읽기에도 편하고 괜찮아서 계속 쓰고 있다고. “전공 특색을 살리고 지향하는 바를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윤기병 원광대 교수(건축학부)가 사용하는 아이디는 ‘cedek’이다.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기 전까진 그 단어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가 설명하길, 아이디는 ‘center for design knowledge’를 요약했단다. 건축디자인분야의 중심으로서 학문을 이끌어 가려는 윤 교수의 노력이 기대된다.

아이디가 각자의 정체성을 완전히 대변할 순 없다. 심경호 고려대 교수(한문학)는 “과거에 지명이나 호, 이름, 서명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던 ‘의미의 시대’가 붕괴되고 현재 ‘기능의 시대’로 넘어가면서 아이디는 하나의 아이콘이자 상징으로 의미가 변질됐다”고 설명했다. 심 교수는 “전근대 시기 동아시아문화권에서는 별도의 이름인 號를 부르는 관습이 있었다”며 “호를 짓는 의미는 자기반성, 지향하는 바, 존재에 대한 겸손함 등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스스로 호를 짓거나 남이 호를 지어주는 것은 주체의 재생과 부활을 경험해 ‘또 다른 나’, ‘이상적인 나’를 살아가는 것이다. 기능의 시대에서 아이디는 이메일, 로그인을 통한 ‘전달’이란 일차적 기능을 담당한다. 아이디는 호와 달리 끊임없이 사라지고 재탄생한다. 하지만 아이디는 의사소통을 위한 중요한 도구이다. 아이디를 통해 우리는 당신의 의미를 떠올리고 상상한다.

학자들은 늘 그랬듯이 부지런히 연구하고 부지런히 이메일과 명함을 주고받으면서 새해에도 뛸 채비를 마쳤다. 우공이 되어 연구에 몰입하거나(woogong72, 이승원 한양대 연구교수), 학문의 소리를 경청한다(ecouter, 노서경 서울대 강사). 때론 상상력을 발휘해 가면서(imagine009,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연구에 열정을 불태운다. 교수들의 아이디가 꿈틀대고 있다.

김유정 기자 jeo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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