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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秘史-최찬식의 청구대학 증언]24. 설립자의 초상(1)
[대학 秘史-최찬식의 청구대학 증언]24. 설립자의 초상(1)
  • 교수신문
  • 승인 2009.12.16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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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一和公 
 
 也靑 崔海淸 先生은 1905년에 父君 一和先生의 第二子로 태어나셨다. 一和公이 서울에서 帝室會計監査官으로 계시던 그 해 正月에 꿈을 꾸니 누른, 어린 곰이 품에 와 안겼고, 이 것을 역시 연달아 꾼 꿈속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물으니 한 사람은 得男하겠다하고, 한 사람은 得官하겠다 했는데, 그 해 시월에 과연 願했던 官職을 얻어 집에 전보를 치고 나니, 집에서는 뒤미쳐 아들을 낳았다는 전보가 왔다고 적고 계신다.(一和先生文集 第一卷) 官職이란 慶北 漆谷郡守職 인데, 正三品 堂上官으로 內職에 계시다가  行郡守로 下鄕하신 것은 大邱 근처에서 老母를 모시고 싶어, 마츰 서울에 老母를 두고 赴任한 漆谷郡守와 자리를 바꾼 것이다. 高宗임금님으로부터는 특히 英特하다고 “英達”이란 이름을 下賜받을 만큼(原名 “鉉達”)寵愛를 누렸고, 막 皇帝의 나라가 되어 그 格에 맞는 高文大冊이 그 손에서 나왔음에도(歷史的으로 보아 곧 亡國을 앞둔 그 帝國의 餘韻이 우리 後孫들에게는 씁스레한 것은 姑捨하고, 帝國의 文章은 帝國의 體貌를 갖추어야했다), 서울을 뒤로 하고 自進 落鄕하신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지 않았나 생각한다. 忠正公 趙秉世은 일찍히 一和先生을  朝廷에서 大用하지 않는 것을 애석히 여겼다고 하는데, 忠正公은 乙巳勒約의 破棄와 賣國五賊을 處斷할 것을 遺疏로 남기고 自盡 하신분이다. 果然 一和公이 어느 大臣을 代筆한 疏文을 보면, 요새 宮中에는 왜 이렇게 雜多한 人物들이 많이 出入을 하고 있습니까, 地方이고 中央이고 適材適所 人物을 잘 써야합니다등, 句節이 있고, 後日 지은 詩에는 나라 亡할 것을 나는 그 때 이미 알았노라고 탄식한 대목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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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二年이 채 못되어 大邱判官으로 나오실때는 漆谷郡에 頌德碑가 넷도 모잘라, 生祠(살아 있는 분의 祠堂)을 지으려 하는 것을 겨우 말렸는데, 郡民이 웃 옷을 벗어 땅에 깔고 떠나시는 길을 막으려 했다하니, 누가 봐도 이것은 慣例에서 나왔다기 보담, 그들의 우러난 眞心의 發露가 아닐까 싶다. (물론 이 것은 그 동안 秕政에 찌든 地方百姓들의 心情을 말해주는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이렇게 仁慈하신 反面에, 上記 監査官에 계실 때 某課 帳簿의 不正事實을 發見하고는, 課長의 이름을 擧名하면서 당장 法部에서 措置하여 依法處理해야한다고 秋霜같은 奏文을 쓰셨다(文集 第四卷). 일쯕 慶尙南道觀察使를 除授받기도 하셨으나, 平素 願은 官職에서 放免될 것 뿐이었는데 如意치 않던 中, 庚戌年 失國을 淸道郡의 東軒에서 맞게 되셨다.  소식을 듣고 卽刻 歸家하여 나라의 士大夫로서 殉國할 것을 決心하고 斷食에 들어가셨다.  닷새를 입에 물도 끊고 있는데, 老母와 친구들의 哀乞과 强勸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그後로는 세상에 계셔도 안 계시는 양, 지내시니, 地方에서는 隱然中에 抗日精神의 中心이 되었다. 一和先生을 기린다는 “尙和契”가 조직되고 契長은, 尹相泰 先生, 金昌淑先生, 崔浚先生(大邱大學의 首頭創立者) 같은 분이 맡으셨는데, 基金에 義捐한 人士들의 名單에는 萬海 韓龍雲先生 이름도 보이는 것은 面識이 있어서 보담, 아마 멀리서 風聞으로 欽慕한 경우가 아닌가 싶다. 庚戌年 殉國하신 李晩燾先生의 아드님 起巖先生과 親交하여 같이 中國으로 亡命하실 約束을 했는데 起巖先生이 일쯕 돌아가시는 바람에 이것도 霧散됐다.  也靑은 靑年時代 西洋의 極端 思想을 대표하는 ‘아나키스트’ 同盟에 몸을 던지셨지마는 根本 바탕은 속일 수 없이 이 儒敎的 志士精神이 아닐까 싶으다. 나라를 잃고 우울한 時代를 만난 新世代 靑年으로서 父君의 그 秋霜같은 精神은 極烈한 ‘아나키슴’ 으로 둔갑한 感이 없지 않다.

 一和公의 隱遁생활은 그저 죽은 듯이 나날을 보내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日本 朝日新聞을 꼬박꼬박 챙겨 보시고 房안에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占치고 계셨다. 내가 가 뵈면 當時 中學生이던 나에게 그 日本 新聞을 飜讀해드릴 것을 명령하셨는데, 日本軍이 破竹之勢로 싱가폴 까지 밀고 나갔을때는 우선 “무던하다”란 말을 한 마디 던지시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먼데를 바라보시듯 虛空을 凝視하시더니, “나는 못 보더라도 너는 볼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셨다 -- 나라의 獨立 말이다. 그러시고 얼마 안 되어 돌아가셨는데, 3年 後에 과연 日帝는 물러 갔다. 내가 小學2年 때 였던가 큰집에 가니 曝書(폭서)를 하고 계시는데, 펴 논 책 속의 한 글字를 가리키면서 그 字를 아느냐고 물으셨다. 알기는 아는데, 日本音으로만 알고 있으니, 이걸 어떻가나, 나는 머뭇거렸다. 할아버지 앞에서 日本말로 대답한다는 것은 당치 않다는 깜냥은 어린 마음에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자 “나라 國字”다, 하셨다. 또 한 번은 마당에서 網巾 없이 상투바람으로 앉아서 새끼를 꼬고 계시는 모습이 영낙없이 村夫子라 내가 깜짝 놀랐다. 서울 宮闕(궁궐)안 이야기 같은 것은 生前에 한 마디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안체는 아예 마다하시고, 大門깐 작은 房을 차지하시니, 이 세상을 등진 隱士의 마즈막 空間이었다.  房앞에는 그저 깨진 질그릇에 蓮根이 심어 있어, 이것이 피어 올린 넓적하고 샛파란 잎사귀들이 이 隱士詩人이 바라 보는 景物의 全部였다.  

 文集 5卷이 있고,  “詩海韻珠”라는 著作이 있으신데, 長子의 이름으로 出刊된 이 책은 지금도 市中의 漢詩敎室에서 必需 參考書가 되어 있다고 들었다. 韻字에 따라 엣날 名句와 自作詩句를 모아 논 책으로, 요새 같으면 圖書館에서 資料收集에 沒頭해야 할 大作을 어둠침침한 房안에서 혼자 몇年인지, 몇 十年인지 혼자 作成하셨다. 詩는 “杜甫와 陸游(放翁)의 口氣”가  있다는 評을 받았으니, 一和公의 生涯 역시 이들 처럼 不遇한 國運에 處하셨고, 平凡한 日常生活속에서 많이 詩題를 얻은 점에서 이 比喩에 首肯이 간다.  그러나 詩를 酷愛(혹애) 하셨음에도 文筆보다는 徹頭徹尾(철두철미) 行實을 앞세우는 분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殉國精神에 더하여 周圍 사람들에게는 至極한 孝心으로 有名하셨다. 어머님께서 痢疾로 변소 다니시길 하로 몇십번 할 때는 며누리를 재쳐놓고, 꼭 당신이 扶側(부측)해 모셨다한다. 아버님이 돌아가신後로는 호박을 안자셨다. -- 아버지께서 좋아 하시던 그 호박을 生時에 못다 해드린 것이 마음 아파서. 어느 白日場에서 孝子를 列擧하는 마당에 당신의 이름이 첫머리에 올라있다는 말을 듣고는, 맏아들을 시켜 기어히 그 이름을 떼어버리도록하신 일이 있는데, 이것은 치열한 潔白性을 말해준다할까. 行狀을 金昌淑 先生이 쓰시고, 墓碑銘은 李始榮 先生이 지으셨는데, 後者 中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번역해서): “만약 公을 일쯕 알아 鴨綠江을 같이 건너서 獨立運動을 같이 했더라면 光復의 날을 좀 더 일쯕 당길수가 있었을 것을.... 오늘 우리가 依支할 곳도 있으련만... 아아, 이런 분을 일쯕 만나뵙지 못한 것이 더욱 恨 이로다.” 이 대목은 平生을 亡命하여 風餐露宿하신 李始榮 先生의 謙遜한 마음을 엿보게도 한다.

 也靑에게는 文字그대로 무서운 嚴父였던 것 같다. 日記에, 하로는 공부하면서 湯藥을 7첩이나 따려냈다는 대목이 있다. 也靑이 무슨 苦痛이 있어 呼訴할 때면, 一和公으로부터돌아 오는 말씀은 그저 “振作해라” 라는 한마디 뿐이었다고, 원망쪼로 나에게 하신 것을 記憶한다. 당신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자식인 나에게 말이다.  이 家風은 也靑 自身이 우리에게 對하신 모습으로도 能 히 짐작할 수 있다 -- 당신께서는 新時代에 태어난 너이들은 나에 比하면 얼마나 호사인지를 모른다고 하시는 것 같했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는 아버지가 歲拜똔을 주시거나, 용똔을 주시거나 하는 風習은 一切 없었다. 最小限 學校만 다니게 해주었으면 그 以上은 네들이 알아서 하라는 態度이셨다. 다만 어디 아픈데가 있으면 卽時報告할 것을 당부하셨지마는, 이것은 病은 發作할 始初에 治療해야만 손이 덜 가는 법이니, 家長의 立場에서 하시는 주문으로 들렸다. 大小집안의 三寸, 四寸, 그리고 家兄들 모두 東京가서 新聞配達하면서 苦學했다. 

 
(2) 大邱高普, 廣陵中學 
 
 也靑은 그 때 風習대로 幼年에는 집에서 漢文을 읽으시다가, 12살에 大邱壽昌普通學校에 들어가셔서 1920年 16歲에 卒業하셨다. 그해 日記帳에 “兄님의 日誌에 所感이 有하여 四月五日부터 始作함이라. 每日 每夕 不缺할 트다.”(原文대로. 以下同) 라고 宣言은 했는데, 사실 缺한 날도 많고, 歲月이 오래될 수록  그 동안 風霜을 살아남은 卷數는 몇 안된다.  그러나 이 記錄하는 習慣이 있으셔 비로소 나의 이 作業도 可能했다.  旅行中 에는 手帖에 ‘메모’ 하셨다가 나중에 日記帳으로 옮기시고, 내가 미국에 있을 때는 不肖 자식이나마 胸中을 吐露하신 長文의 편지도 많이 쓰셨다.

 그 해, 즉, 1920年 5月1日, 막 卒業한 母校를 찾으니 先生님이 “너는 무엇을 하나 무르심에 漢文을 익는다 하니, 우서면서 거도 조허나 너는 앗갑다 하시더라” 고 日記帳에 적고 있다. 아마도 이 것이 刺戟이 되어 一和公을 조루어 成功을 했는지 이듬해 ‘21年 4月 에는 大邱高普에 入學하셨다.  ’22年에는 日本中學과 資格을 같이 한다고 다시 校內에서 在學生들이 編入試驗을 치르게 되는데, 55,6名中 40名 合格에 席次 3番이라고 日記에 적혀 있다.

 그 前해 가을, 高普 一學年 때 父母의 命에 따라 冠禮를치르고 몇일後에는 소위 장가를 드신다. 오늘은 學校에서 일쯕 나오너라 하시는 말씀을 듣고 午後에 新婦집에 가서 婚禮를 치르는 식이었으니, 本人은 不滿과 不平이 가득했으나, 이것은 日記帳에나 吐露할 뿐,父母의 令에 順應할 수 밖에 없었다 - 지금은 공부에만 集中하고싶은 靑少年이었는데.  장가 든 이튿날 친척집을 돌아다니는데, 갓은 동생한테 들리고 大門앞에 당도하고서야 받아 쓰고 그 집안으로 들어 갔다고 日記에 적었으니, 1921年만 해도 벌써 中學生이 갓을 쓰고 白晝大路를 다니기에는 쑥스러운 세상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父母의 命이니 할 수 없었고, 이듬해에 長男을 얻었으니 自然의 攝理도 할 수 없었다. 

 1923年 三學年때에는 어느 日人敎師의 民族的侮辱에 抗拒하는 同盟休學事件으로 警察에 拘致되고 學校로부터는 退學을 당했다. 反省文을 쓰면 復學을 시켜주겠다 했는데도,이 것을 拒否하고 退學을 甘受했다한다. 이 事件은 1929年 光州에서 시작한 學生抗日運動보다 6年을 앞선 學生抵抗運動으로, 大邱의 光復會支部의 展示場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보다 일쯕 1919年 즉 己未年 萬歲運動때에는 壽昌普通學校 上級生으로 校生들을 이끌고 校門을 나오려다가 制止당한 일이 있었다.

 大邱高普를 逐出당한 그 해 日本廣島에 건너가 廣陵中學이란 私立學校 三學年에 編入되었다. 編入試驗에 數學滿點을 받아 全校에 이름이 알려졌다고 한다. 他校에서, 그것도 그들로 봐서는 植民地 僻地(벽지)學校에서 온 學生이 생소한 남의 學校 先生이 出題한 試驗에 滿點을 받았으니, 놀란 것이다.  그러나 學資金도 如意치 않는데 病이 겹쳐 1925年에는 짐을 싸고 돌아와야만 했다. 그래서 그 學校의 卒業狀도 없다. 日記에 보면 廣島 어느 病院의 看護婦가 “저 사람은 아무 病도 없다는데도 또 왔다고 웃는 꼴을 보인다”는 대목이 있다. 醫師는 病을 못찾겠는데 本人은 앞아 죽겠다는 이런 경우다.  이 症勢는 本人만 알고 남은 못 알아주는 苦痛으로 平生을 따라다닌다. 平生 湯藥을 물 마시듯 입에 달고 살으셨다. 남 모르게 자기 몸을 살펴야 하는 이 딱한 事情을 모르는 어떤 친구는 貴族的이란 말로 꼬집고 있다고도 , 日記에 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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