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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의 공간, 美‘세계박람회’
망각의 공간, 美‘세계박람회’
  • 김덕호 한국기술교육대·교양학부
  • 승인 2009.12.07 17: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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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속의 경제위기를 본다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미국에서의 세계박람회는 기분전환이나 일상 벗어나기 그 이상이었다. 차라리, 박람회는 그것을 만든 시대를 드러내주는 그리하여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의미심장한 사회적, 문화적 인공물”이었다. 특히, 박람회 공간이 단순히 현실도피의 공간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공간 혹은 미국적 기업 자본주의를 지키기 위한 공간으로 활용됐다. 또한 박람회는 위험 수위에 이른 빈부 간, 계급 간, 그리고 인종 간 갈등을 잊게 하는 공동의 망각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했다.

1851년 런던의 수정궁 박람회 이후 세계박람회는 국가 주도로 기획되고 진행됐다. 비록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나아가 자체적으로 전시관을 운영했다손 치더라도, 그 공간은 근본적으로 국가가 주도하던  공간이었다. 그런데 불황이 심화되면서 국가가 아닌 기업 그것도 대기업이 박람회장의 하이라이트 역할을 하게 됐다. 또한 박람회 공간은 기업에서 생산된 신제품의 전시가 아닌 기업의 이미지를 전시하는 공간으로 바뀌게 됐다. 따라서 1930년대 미국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는 ‘국가’와 ‘생산’이 아니라 ‘기업’과 ‘소비’가 중심 이념이 된 ‘국가적 이벤트’의 공간이 됐다.

뉴욕 박람회의 7개의 주제관 중의 하나인 ‘생산과 분배’관은 에그먼드 아렌스에 의해 기획되고 전시됐다. 그는 이 전시관을 통해 대량생산이 불가피하며 대량생산이 미국인들을 “탈출이 불가능한 그물(net)”에 묶어두는 역할을 한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다. 또한 기계의 힘을 통해 “어두운 희소성의 시대”에서 “새로운 풍요의 시대”로 전환됐지만, 후자의 경우 현재 “풍요함과 경제적 불평등 사이가 모순상태”에 있음을 지적했다.

그가 볼 때, 대량생산은 대량 구매력에 의존하는데, 문제는 대량 구매력의 불평등한 분배로 인해 경제적 번영이 지속되지 못했다고 보았다. 전시관에는 이러한 생산과 분배의 왜곡된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도표가 있었다. 전시관에는 이러한 생산과 분배의 왜곡된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도표가 있었다. 그래프는 미국 가정의 1/3이 생존 수준 이하에서 살고 있으며, 우량한 생활에 필요한 최소 조건인 2천5백달러 미만으로 사는 사람들이 전체 미국인들의 90%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따라서 10%의 미국인들은 1930년대 후반 대공황의 영향력 밖에서 사치 수준의 생활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대기업의 과잉생산으로 인해 빚어진 대공황임에도 불구하고 대기업은 자신들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지속적인 기업 광고를 통해 전달했다. 또한 1933년과 1939년 박람회를 통해서 경제적 어려움은 대기업이 만든 그리고 만들어낼 새로운 제품들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었다. 따라서 대기업은 절망에 빠진 보통의 미국인들에게 희망이 됐다. 사회주의적 개혁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경제 및 사회 개혁을 외치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평균적 미국인’은 과학과 결합된 산업의 힘을 믿고자 했다. 미래지향적인 1930년대 박람회들은 그리하여 가까운 시일 내에 과학기술의 힘에 의해 그러한 힘을 응용한 대기업의 신제품들이 미국을 대공황 상태에서 건져줄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해주었다. 시카고 박람회의 모토처럼, 과학이 뭔가를 찾아내고 대기업이 응용한다면 미국인들은 순응하기만 하면 됐다. 현재의 어려움을 잊고 과학적 진보와 기술적 발달로 찾아올 미래만을 생각해야했다. 빠르게 변화하는 현재는 영속적인 것이 아니기에 과거 또한 무시하며 오직 꿈꾸는 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내일의 세상’을 기다리기만 하면 될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프랑스인들은 과거에 대한 “기억의 파괴”를 강요당했으며, 그들에게는 앙시앵 레짐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잊어버리는 것이 “시민의 제일가는 의무”가 되었다. 이러한 ‘공적 망각’에 대하여, 나아가 기억과 망각의 상호작용에 관한 시인 폴 발레리의 사유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는 현재가 과거를 “되불러” 올 때, “현재 행위의 목적에 적절하고 좋은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해 과거에 개입하게 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발레리가 볼 때, 이것이 바로 ‘과거의 미래’에 해당되며, 그는 이것을 ‘미래의 기억’이라고 비틀어 말했다. 이와 유사한 상황이 30년대 미국의 세계박람회에서 재현되었다. 다만 현재가 과거에 개입하는 대신 현재가 미래에 개입하는 상황이었다. 1930년대 시카고 및 뉴욕 세계박람회는 실현되지 않은 미래를 기억하고 추억하기 위한 공간이 되었으며, 동시에 암울한 현재를 위한 거대한 망각의 공간이 되었다.

이 글은 지난 5일 열린 제4회 전국서양사연합학술대회에서 발표된 ‘유토피아를 위한 망각의 공간: 1930년대 대공황과 미국의 세계박람회’를 요약한 글입니다.

김덕호 한국기술교육대·교양학부

김덕호 한국기술교육대·교양학부

 

필자는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사를 전공했다. 저서로 『아메리카나이제이션 : 해방 이후 한국에서의 미국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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