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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프랑스에서 받은 충격
[문화비평] 프랑스에서 받은 충격
  • 이승우 도서출판 길·기획실장
  • 승인 2009.11.30 17: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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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 들어 출판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상황들 가운데, 출판이 지속적으로 상업화함에 따라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고착화돼 간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이제 ‘책’의 내밀한 담론보다는 책을 통해 ‘돈’을 벌어야 하는 시대, 즉 고유한 책의 속성은 잊혀지고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출판이 21세기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자연스레 이러한 현상의 귀착점은 몇몇 대형 출판사와 소규모 출판사의 양극화 현상을 가져올 것이며, 중간 규모의 역량 있는 출판사들이 소멸해감에 따라 출판의 고유한 기능 가운데 하나인 문화의 다양성 창출이라는 측면에서도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은 뻔하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비단 우리 출판계만의 문제는 아니다. 미국이야 전형적인 인수합병의 천국인 만큼 어떤 출판사가 해가 바뀌면 다른 출판사 자회사로 편입되고 책의 목록도 180도 바뀌지만, 그래도 유럽의 출판문화는 고유한 문화적 다양성을 그나마 지탱해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번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참관을 마치고 프랑스에 들러 한 출판사를 방문했던 경험은 위와 같은 출판 현실 속에서 매우 충격적이었다. 출판사 이름은 라 파브리크(La fabrique) 출판사. 현재 프랑스 지성계를 이끌어가고 있는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장-뤽 낭시, 다니엘 벤사이드를 비롯해 조르조 아감벤, 슬라보예 지젝 등 쟁쟁한 저자군을 갖고 있는 출판사임에도 전 직원은 단 둘뿐이다. 출판사 건물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래도 프랑스 발군의 인문학 출판사인데 하는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외국계 이주노동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파리시 외곽 벨빌(Belleville)에 자리잡은 이 출판사의 건물은 실평수 3평 내외의 창고 같은 사무실에, 화장실은 사무실 밖 한켠에 줄을 잡아당겨 내리는 수세식 변기만 달랑 놓여있는, 우리로 치면 1970년대 허름한 관철동 시대 출판사 사무실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책을 내지 않고, 최고의 저자와 최고의 원고만 있다면, 자신들의 살림살이 규모에 맞게 책을 기획하고 펴낸다는 것이다. 마케팅 활동도 없지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저자들과의 지속적인 ‘생각’의 교류이다. 따라서 외형적 매출이나 화려한 건물은 그들이 추구하는 바가 아니다. 출판사 설립자인 에릭 아장(Eric Hazan)의 이력을 보면 더더욱 그런 현실이 살갑게 다가온다. 프랑스의 유력 출판사인 아장 출판사를 세운 자신의 아버지가 출판사를 운영하는 동안 은행빚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고, 물려받은 아장 출판사를 아셰트 출판그룹에 넘기고 자본의 논리에 구속받지 않는 출판사를 만들어야겠다는 다짐 아래 만든 것이 바로 라 파브리크 출판사였던 것이다.

    나이가 70세임에도 불구하고 당대 인문학계의 흐름을 꿰뚫고 최고의 책을 펴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역시 프랑스 지성계를 대표하는 실천적 지식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창립 이후 10여 년 동안 펴낸 종수는 60여 종이지만, 그 목록을 보면 이 출판사가 어떤 생각을 갖고 출판행위를 하고 있는지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극명하게 드러난다. 지난 해 자크 랑시에르를 초청했을 당시, 나는 그에게 당신은 왜 그렇게 작은 출판사에서 책을 펴내냐고 질문한 적이 있다.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인문정신이 바로 그런 것이라고. 그 역시 ‘정신 교류’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출판의 여건은 갈수록 암담한 상황이다. 근래 들어 e-북에 대한 신문기사를 접하면 깜짝깜짝 놀랄 정도이다. 활자문화 시대도 끝나 영상문화 시대로 접어든 지금, e-북은 감당하기 어려운 출판지형의 획기적 전환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 이 땅에서 책을 펴내는 것은 생각의 다양성, 곧 문화의 다양성을 넓히고자 하는 뜻에서 그러하다. ‘자본’의 논리보다는 ‘생각’과 ‘뜻’이 우선되는 작은 출판사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있을 때, 그나마 우리 출판문화는 건강성을 유지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의 저명한 카프카 전공자이자 자신이 출판사 대표인 클라우스 바겐바흐의 다음과 같은 말은 아직도 유효하다. “새롭고, 이상하고, 터무니없고, 지적 자극을 담은, 혹은 다분히 실험적인 책들은 극히 적은 부수나 이를 조금 넘는 정도의 부수만 발행된다. 이것이 중소 출판사의 과업이다. …… 한 마디로, 적은 부수로 출판되는 책들이 사라진다면 미래도 소멸한다. 카프카의 첫 책은 800부를 인쇄했다. 브레히트의 경우는 600부였다. 과거의 누군가가 이 책들을 찍는 일은 돈 낭비라고 결정했다면, 오늘날 어떤 일이 벌어졌겠는가?”(앙드레 쉬프랭, 『열정의 편집』)

이승우 도서출판 길·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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