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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가능성 또는 아시아적 가치는 어떻게 포착되는가
소통의 가능성 또는 아시아적 가치는 어떻게 포착되는가
  • 홍지석 객원기자·미술평론가
  • 승인 2009.11.16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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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후쿠오카 아시아미술 트리엔날레(2009.9.5~11.23)를 주목하다

외부로부터의 ‘근대화’ 수용 이후, 서구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글과 작품을 접하고 배우면서 우리는 항상 ‘나는 누구인가’ 또는 ‘우리는 누구인가’를 되묻는다. 이러한 자문은 우리 자신의 가치를 지키거나 되찾고자 하는 시도로 이어지곤 했다. 서구화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개화기 東道西器, 舊本新參이라는 기치하의 일련의 시도들, 또는 그 이후 민족주의나 탈식민주의를 내걸고 진행된 일련의 움직임이 그것이다. 이런 사정은 비서구권 대부분의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中體西用이니 和魂洋材니 하는 말들이 그러한 정황을 대변해준다.

이렇게 우리 자신의 가치를 지키거나 되찾고자 하는 이에게 ‘동양’, 또는 ‘아시아’라는 단어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이 단어들은 너무 국지적이지도 않고 또 너무 포괄적이지도 않은 가치를 표상하기 때문이다. 개별성과 보편성을 아우르는 가치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실제로 근대-서구-글로벌의 도식에 맞서 전통적 가치를 계승, 발전시키고자 했던 동양권, 또는 아시아 각 지역 지식인과 예술인들의 경험은 우리에게 소중한 지침, 교훈이 될 수 있다. 또 더 나아가 동양 내지는 아시아 지식인, 예술가들과의 연대와 협력을 통해 서구의 그것을 뛰어넘는 보다 긍정적인 가치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베트남 태생인 딘 큐 레의 3D 애니메이션 작업 「남중국해 피시쿤」(사진 위)과 한국작가 김수자의 「뭄바이: 세탁장」.
하지만 우리는 때로‘동양적 가치’또는 ‘아시아의 혼’같은 말들에 거부감을 느낀다. “아시아는 하나다”라고 외치며 “공통된 사상적 유산으로 연결된 아시아의 복합적 통일을 특히 분명히 실현하는 것이 일본의 위대한 특권”이라는 오카쿠라 텐신의 위험천만한 발언, 그리고 그 이후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미명 하에 전개된 폭력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동양, 아시아라는 단어는 한편으로 매우 긍정적인 함의를 지니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 일본 제국주의와 연관된 부정적인 함의도 갖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시아성’을 전면에 내걸고 일본 후쿠오카 아시아미술관에서 진행하는 아시아미술 트리엔날레는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1999년 제1회 아시아미술 트리엔날레의 주제는 ‘대화: 희망을 향한 통로’였다.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었을 때 일본인들에게 그 세계를 향한 창으로 기능했던 규슈 후쿠오카라는 도시에서 다시금 소통의 가능성과 아시아적 가치를 묻자는 것이 이 전시의 취지였다. 2002년에 열린 제2회 트리엔날레의 주제는 ‘이야기하는 손, 이어주는 손: 작업장을 상상하다’였다. 이 전시는 手工이라는 로우테크를 통한 소통과 관계 회복에 초점을 두었다. 2005년에 열린 제3회 트리엔날레의 주제는 ‘다중세계’였다. 이 전시는 대중문화에 영향받은 아시아 젊은 작가들의 작업을 전면에 내세웠다.

21개국 43명의 작업 선보여

그리고 지금 제4회 아시아미술 트리엔날레(2009.9.5~11.23)가 진행 중이다. 이 전시의 주제는 ‘共再生: 내일의 창조자들’이다. 공재생은 공생과 재생을 합성해 만든 조어다. 여기서 공생은 개인간, 집단간 상호공존을 함축한다. 그러한 공존은 물론 하나가 다른 하나를 착취 억압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이득을 줄 수 있는 관계다. 그렇게 호혜적인 관계에서 창조적인 재생이 가능하며 희망적인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는 것이 기획자들의 생각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파괴, 또는 해체된 작은 것들을 되살리는 작업에서 시작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비합리적인 자본의 배치, 관습적인 방식, 낡은 사고에 의존하기보다는 주변 물체들이나 공간,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지혜, 그리고 기존의 체계를 활용하여 창조적인 재생으로 이끌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전시의 메시지다.

전시에는 모두 21개국 43명(또는 그룹)의 작업이 배치돼 있다(전시를 기획한 후쿠오카 아시아미술관 구로다 라이지 학예과장에 따르면 아시아 국가 중 빠진 나라는 북한과 브루나이 뿐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김수자, 김성윤, 안정주, 김홍석 등 한국작가들의 작업도 포함된다. 이러한 배치는 共再生의 가능성을 대략 다음의 네 가지 범주로 제시한다. 1)일상적인 사물, 공간을 해체, 재구성함으로써 그것을 재활성화시키는 작업 2)도시 환경과 자연 생태의 호혜적 관계를 모색하는 작업 3)은폐되거나 잊혀질 위험에 놓인 역사, 기억, 전통을 소생시켜 내일로 계승시키는 작업 4)전문 예술가들과 사회-문화적 행동, 또는 ‘내일을 창조하려는’ 의지를 가진 개인을 연계하는 작업.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 곧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러한 범주들이라기보다는 단번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없는 복합적이고 다중적인 양상이다. 여기에는 실험성과 유희성을 부각시킨 고도의 현대적인(!) 작업이 있는가 하면 예술을 여전히 종교적, 제의적 의식으로 제시하는 전통적 작업이 뒤섞여 있다. 또 천, 나무 등을 재료로 하는 수공 작업이 있는가 하면 뉴미디어를 사용한 인터랙티브 작업도 있다. 또한 도시적인 요소와 비도시적인 요소가 공존한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돌아보면 이러한 이질적인 것들의 접합이 충돌과 충격으로 이끌어지기보다는 딱히 뭐라 표현할 수 없는 통일성으로 이끌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과거 제1회 트리엔날레에 대해 최은주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가 관찰했던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아시아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공통의 미감”이 이와 유사한 느낌일 것이다. 이런 통일성에 기대어 보면 앞서 언급한 네 가지 범주가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규정짓기 어려운 통일성의 여운

규정짓기 어려운 통일성의 느낌은 내게 오래 전 야나기 무네요시가 말했던 민예적인 어떤 것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에 자연스럽게 ‘모든 구성원들의 의견과 생각이 존중되며 그들 각자가 완전히 동등한 관계에서 작업하는’아나키스트적 공동체의 이념이 덧붙는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트리엔날레가 그간 대화나 手工, 다중, 공생 등의 주제를 내세운 이유를 납득할 수 있다. 이런 주제를 통해 기획자들은 전시가 추구하는 아시아적 가치를 오카쿠라 텐신류의 아시아적 가치와 별개의 것으로 제시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아시아적 가치의 실체를 의심하는 논자들에게 이 전시가 제시하는 가치란 여전히 애매하거나 또 하나의 특정 이데올로기에 감염된 것일 수 있다.

하나 덧붙이자면 이 전시는 꽤 잘 만들어진 전시다. 김준기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의 말을 빌자면 이 전시는 “유명 작가들을 거의 동원하지 않으면서 전시를 짜임새있게 구성하는 데 성공한” 드문 사례다. 여기서 우리는 낯설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운 작업들과 잡다하지만 통일성있는 배치를 접하게 된다. 미술사와 인류학을 전공한 학예사들이 지난 3년간 수십 차례의 현지 조사와 연구로 생산한 결과다. 그렇게 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은 미술 분야에서 ‘아시아적 가치’를 체계적으로 선점하고 있다. 그렇게 그들은 ‘세계를 향한 아시아 문화의 창’을 조심스럽게 열기 시작했다. 

 

홍지석 객원기자·미술평론가 kunst75@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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