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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미술 기점 1890년 … 일본미술 관련성 적극 해석
근대미술 기점 1890년 … 일본미술 관련성 적극 해석
  • 홍지석 미술평론가
  • 승인 2009.11.09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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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_ 홍선표 지음, 『한국근대미술사: 갑오개혁에서 해방시기까지』, 시공사, 2009.

한국 미술사 서술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19세기까지의 전통 미술사와 20세기 이후의 근현대미술사 서술이 사실상 분리돼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조선 말기까지의 고미술사 서술의 고전으로 평가받는『신판 한국미술사』(1993)는 고고학자 김원룡과 미술사가 안휘준이 집필했고, 1979년 초판본이 나온 이래 20세기 이후 한국근현대미술사를 대표하는 논저로 자리를 굳혀온 『한국현대미술사』는 미술평론가 오광수가 집필했다. 이러니 진정한 의미의 한국미술 통사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옳다.

이런 문제의 한복판에 ‘근대’가 자리한다.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적인 것과 새롭게 대두한 동시대적인 것,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들이 어지럽게 교차하는 근대의 한국미술을 체계적으로 서술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미술사가의 역사적 시야뿐만 아니라 비평가의 비판적 시선 또한 필요하다. 미술사가이자 미술비평가인 연구자들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근대미술’을 둘러싼 미술사가들과 비평가들의 대화와 협력은 현재 진행형이다. 특히 1993년 창립돼 현재까지 한국근대미술 연구의 산실로 기능해온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다수의 미술사가들과 비평가들이 집필한 이 학회의 논문 목록은 그 자체 한국근대미술사 서술의 역사를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더불어 1990년대 후반 이후에는 새로운 시각과 방법론으로 한국근대미술사를 서술한 내실있는 단행본도 속속 출간되고 있다. 김영나의 『20세기의 한국미술』(1998), 최열의 『한국근대미술의 역사』(1998), 윤범모의 『한국근대미술』(2000) 등이 그것이다. 또한 2006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 ‘한국미술 100년’전을 기해 중요 근대미술연구 성과를 망라한 『한국미술 100년』이 출간됐다. 이 단행본들은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한국근대미술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를 더했다.

전통에서 근대로, 대화적 상상력


그리고 지난 9월 또 하나의 중요한 단행본이 출간됐다. 홍선표 이화여대 교수의 『한국근대미술사』가 그것이다. 이 저서의 의의는 무엇보다 저자가 조선시대회화사의 권위자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저서의 저자들이 대부분 현대나 서양 미술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해 한국근대미술을 다뤘다면 『한국근대미술사』의 저자는 전통미술 연구에서 출발해 한국근대미술을 다뤘다. 전통과 현대의 대화라는 견지에서 보면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머리글에 따르면 저자는 본래 근대미술에 대한 관심에서 1977년 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했으나 안휘준 교수의 지도로 조선시대회화사 연구로 진로를 바꾸게 됐고, 1985년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의 권유로 노수현의 산수화를 다룬 글을 발표하면서 다시 근대미술에 관심을 갖게 됐다. 『한국근대미술사』는 저자가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잡지에 연재한 글을 수정, 보충해 단행본으로 펴낸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책의 목적은 “우리 미술의 출생의 역사와 더불어 한국미술사의 근대적 변천과 그 단계성을 개관하는 것”이다. 이는 한국 전통 미술사와 근대 이후 미술사의 통합적 구축에 기여할 것이라는 게 그의 기대다.

‘미술’의 발생과 삽화·인쇄미술에 주목

이 책의 중요한 특징을 몇 가지만 열거해보기로 하자. 먼저 근대미술의 기점을 1890년대로 잡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 시기는 한국미술사에서 근대적 표의·표상 시스템과 시각법 및 수용 형태가 본격적으로 태동된 시기다. 갑오개혁을 전후로 한 시기에 ‘지금의 우리’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고 새로운 표상시스템과 시각체제를 지닌 ‘미술’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의 초반부가 독일어 ‘Bildende Kunst'를 번역하기 위해 일본 메이지 정부가 만든 造語 ‘미술’이 19세기 말 書畵 등 기존의 개념을 대체하고, 새로운 장르가 출현하는 과정을 서술하는데 집중하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사회문화론 또는 시각문화론을 수용한 이러한 견해는 매체나 제도의 변화, 변화에 수반되는 인간의 지각, 인지 방식의 변화를 중시한다. 그래서 저자는 책 전체에 걸쳐 교육제도, 전시제도, 매체, 또는 작품제작과 유통 방식의 변화에 큰 관심을 기울인다. 이런 변화를 가장 뚜렷하게 반영하는 것이 바로 삽화와 인쇄미술이다. 그간 우리 근현대미술사 서술에서 거의 배제됐던 삽화나 인쇄 미술을 비중있게 다룬 이유다.

한편 근대의 기점 문제가 이렇듯 본격적으로 다뤄진 데 비해 과연 근대가 어디까지인지, 즉 근대는 현대와 대별되는 개념인지 아니면 동일한 개념인지 같은 문제는 거의 다뤄지지 않고 있다. 다만 책의 마지막 장을 해방 시기로 잡은 것으로 보아 저자가 1950년대를 기점으로 한국미술의 근대와 현대를 구별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마무리 된다. “한국미술은 189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의 60여 년간의 개화기와 식민기, 해방기를 통해 ‘개화’와 ‘개조’, ‘갱생’, ‘건설’의 단계를 거치면서 근대성을 추구해왔다. 이제 단정수립으로 야기된 1민족 2국가의 분단 상태로 세계 냉전체제의 첨봉에서 통일과 탈식민, 탈근대의 과제를 안고 이념과 창작의 새로운 분파적 대립 속에서 현대화를 추진하게 된다. 이러한 현대화는 1945년 10월 처음 설치된 이화여대 예림원의 미술과를 비롯해 조선대와 서울대, 홍익대의 미술학과, 그리고 평양 미술대학 등 국내 미술학교 출신들이 활동하기 시작하는 1950년대 후반 무렵부터 서양 현대미술과의 직접적인 교류와 더불어 본격화되었다.”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우리 근대미술을 세계미술의 중심이었던 서양미술과 동아시아 미술의 중앙이었던 일본미술과의 연계선상에서 분석, 해석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가 보기에 기존의 근대미술사 서술은 반식민주의사관에 따른 내재적 발전론이나 저항민족주의에 속박돼 적잖이 사실을 왜곡해왔다. 실증을 중시하는 새로운 미술사는 “지금의 우리 미술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세계를 보고 일본의 정세를 간파해야 한다”는 김복진의 발언을 귀담아들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이 책에는 당시 우리미술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깊이 관여하며 큰 영향을 미쳤던 일본 미술가들이 다수 등장한다. 아울러 1940년대 전시동원체제하에서 제작된 ‘시국미술’ 역시 감정적 흥분이 배제된 차분한 어조로 서술됐다. 특정 이데올로기 이면에 은폐되거나 괄호쳐져 있던 것을 들춰내는 일, 신화화됐던 것을 탈신화화하는 일은 사실관계의 확인에 기초한 통시적, 공시적 근대미술사 서술의 기초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시도다.

근대미술 변화단계 유형화 설득력 약해

이 책은 독자들로 하여금 지금까지와 다른 관점에서 한국근대미술사를 바라보도록 권한다. 그리고 그러한 요청에 부응함으로써 우리는 한국미술과 ‘근대성’을 새로운 관점에서 조망할 기회를 얻게 된다. 물론 이 책은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먼저 제도나 매체를 강조하면서 필연적으로 작가나 작품에 대한 논의가 빈약해졌다는 문제가 있다. 문화사와 미술사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저자가 강조하는 제도나 매체의 변화, 또는 삽화나 인쇄미술이 이른바 순정미술의 형식과 내용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세세하게 고찰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한 것도 아쉽다. 이런 한계로 인해 ‘개화’와 ‘개조’, ‘갱생’, ‘건설’로 요약된 우리 근대미술의 변화단계 유형화 역시 큰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우리 근대미술에 대한 연구가 이제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음을 웅변하는 저작이다. 또한 이 책은 근대와 근대성의 문제를 ‘시각’과 관련해 살펴보고 싶은 논자들이 응당 펼쳐봐야 할 저술 목록에 포함돼야 할 것이다.

홍지석 미술평론가 kunst75@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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