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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삶 그 끝없는 항해에서 만난 나침반 하나
배움의 삶 그 끝없는 항해에서 만난 나침반 하나
  • 김성길 광운대·교육학
  • 승인 2009.10.26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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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痂: 배움』한준상 지음 │ 학지사 │ 2009 │943쪽

배움은 언제나 진행형이다. ‘배움을 다 이루었다.’고 마침표를 찍는 그 순간 다시금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거대한 바위덩이를 짊어지고 산 위로 올라섰다가 다시 굴러 떨어진 바위덩이를 짊어지고 올라가야 하는 시지포스처럼, 인간은 배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존재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인간은 가능성을 지닌 존재다. 이는 모든 인간이 배움의 본성을 타고났기에 그렇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에 비해 우월하다고 판단되는 부분이 배움력이다. 모든 인간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기본적으로는 배움의 능력을 타고났다. 이런 배움의 인간을 통칭해서 호모 에루디티오(Homo Eruditio)라고 한다.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배우는가?’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하고 반추하고 깨달아가는 존재가 바로 배움의 동물로서의 인간이다.

아인슈타인이 나침반을 처음 보았을 때 어느 쪽으로 돌려도 항상 북쪽을 가리키는 바늘의 모습을 보고 ‘사물의 이면에는 반드시 깊숙이 감춰진 무언가가 있다.’는 통찰을 얻었다고 한다.

『生의 痂: 배움』은 배움(Erudition)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몸서리쳐지도록 진중하게 사고하고 고뇌한 경험의 결정체다. 이 책은 간학문을 넘어 다학문적이고 복학문적이다. 인간학, 철학, 문학, 역사학, 종교학, 심리학, 사회학, 경영학, 생물학, 화학, 물리학, 뇌과학 등 인문학과 사회과학, 자연과학, 공학에 이르기까지 학문의 범위를 넘나드는 엇지르기의 본보기다. 이는 인간 존재에 대한 호기심과 인간 본성에 관한 치열한 고민에서 나온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태어남이 하나의 상처’라고 이야기한다. 삶의 탄생이 기쁨이고 즐거움이지만 그와 동시에 첫 번째 상처라는 것이다.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삶도 없었을 것을 태어났기에 삶이 시작됐고 그것이 상처로 남는다. 태어남(生)과 동시에 언젠가 맞이할 죽음(死)을 준비해야 하는 인간의 실존적 한계가 바로 상처이고, 이런 상처들이 하나둘씩 아물면서 딱지가 앉고 그 딱지가 떨어지면서 무엇인가를 깨달아 갈 때 각자의 배움이 드러난다.

삶의 생채기와 딱지떼기
    배움이 무엇인지 명확히 정의 내리지는 못할지라도 인간은 각자 자신의 삶을 위해 무엇인가를 배운다. 하루하루 무엇인가를 접하고 익히고 만들고 밝혀내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살아가고 알아간다. 그것이 삶이고 그것이 앎이다. 그래서 사람은 삶과 앎의 두 축 사이에서 각자의 삶살이를 지속한다. 그렇게 배워간다. 어제 덜 배운 것을 오늘 더 배우고, 어제 잘못 배운 것을 오늘 잘 배우고, 어제 다 배우지 못한 것을 오늘 다시 배우고, 그렇게 하루하루 배워나간다.

    배움은 채움과 비움이라는 이중구조의 새끼줄이 아니라 거기에 하나가 덧붙여져 삼중구조의 단단한 동아줄을 이룬다. 그 하나가 바로 쉼이다. 말하자면, 배움은 ‘정보 축적을 위한 학습, 삶의 자세를 가다듬는 공부, 삶의 흐름을 고르는 여가가 얽히고설켜서 하나의 직조를 이루는 과정’이다. 이때 쉼은 호흡이고 숨고르기고 숨쉬기다. 모든 인간은 각자 개인차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숨을 쉰다. 호흡이 멈추는 순간 삶의 저편으로 옮아가게 된다. 배움은 이런 숨쉬기가 연속하는 과정이다. 천천히 쉴지 가쁘게 쉴지는 각자가 선택할 일이지만 중요한 것은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이며 숨쉬기의 선택권은 절대적으로 각자에게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각자성은 하루하루 접하는 일상에서 뭔가 새로운 의미(meaning)를 만들거나 그 속에서 쓰임새(significance)를 찾아내는 선택의 준거가 된다. 삶은 의사결정의 연속체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디로 갈까 등등 매순간 선택을 필요로 하고, 이때의 선택 기준은 대안 가운데 각자에게 더 ‘의미’ 있고 ‘의의’ 높은 것을 고르는 것이다. 이런 의미 만들기와 의의 찾기는 스스로의 삶을 탄탄하게 다지는 배움의 작업이다. 의미 있는 삶은 각자 스스로 찾고 다지는 동시에,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하면서 서로 소통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때의 소통은 일반적인 言語交通을 넘어선다. 서로 통한다고 하면서 상대에게 집중하지 않고 배려하지 않는 언어교통은 소통이 아니다. 진정한 소통은 의식소통이다. 서로의 눈짓 손짓 몸짓만으로도 알 수 있어서 말이 필요 없는 수준이 의식소통이다. 의식의 소통은 좋은 친구들과의 同行을 기억(remember)하게 한다. 말하자면, 반복해서(re-) 좋은 벗(member)들과 만났다가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과정이 의식소통이다. ‘언제까지나, 영원히’로 서로에게 부담주기보다는 ‘지금 여기서, 내일 다시’를 기약하는 것이 더 행복한 동행인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야기했던 ‘카미노(camino)’를 실천에 옮겼다고 한다. 지난 여름 스페인 산티아고의 1천km 순례의 길을 걸으면서 스스로 삶의 생채기 속에서 딱지를 때내는 깨달음의 과정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그 과정이 채움과 비움과 쉼의 연속이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고 삶에 쓰임새를 찾는 배움의 행함이며, 각자의 배움력을 더불어 소통하는 개조의 삶이었으리라 사료된다. 결국, 배움은 단순한 정보의 소유만도 아니고, 마음으로만 하는 결심도 아니고, 몸과 마음을 다해 접하고 익히고 만들고 나누는 행함의 決斷이다. 이런 배움은 어느 한 순간의 일회적 이벤트로 마무리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숨이 멈추는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추구해 나갈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교육에서 배움으로
   삶은 몸과 마음을 다해서 앎을 지속하는 행함의 개조(reformatting) 과정이다. 채움과 비움, 쉼의 반복 속에서 각자로서의 자신을 반추하고 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것이 배움의 삶살이다. 이런 배움은 경쟁보다는 배려가 앞선다. 경쟁이 있다면 이는 다른 이들보다 앞서야 한다는 강박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과의 치열한 견주기가 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배움은 지금까지의 교육을 넘어선다. 지금껏 교육학은 교수-학습을 중핵으로 여겨왔고, 그 속에서 학습은 교수의 결과물로 치부돼 ‘가르치면 배운다는 식’으로 기계적이고 도구적으로 인식됐다. 이런 경쟁 중심 교육문제의 해결방안을 기존의 교육학 내부에서 찾기에는 한계가 있다. 보다 본원적인 관점에서 교육과 인간과 삶과 앎을 바라볼 수 있는 패러다임이 필요한 때다. 이는 기존에 없던 새로운 무엇인가를 발명해내는 과업이 아니라, 일상에서 감춰져있던 근본을 다시금 발견하고 발굴해내는 과정인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자기조직화’로 마무리하고 있다. 결국은 각자의 배움력으로 귀결하는가 싶은 아쉬움이 남지만 그와 동시에, 저자의 광범위한 학문적 호기심에 비추어 다음 저술을 기대하게 되는 것은 필자만의 착각은 아닐성싶다. 배움은 늘상 암벽으로 우리 앞에 놓여있다. 그 암벽을 넘어설 때 새로운 길을 열 수 있다. 오늘 이 책을 통해 배움과 삶과 앎에 대한 나침반을 하나 발견한 기분이다.

김성길 광운대·교육학

필자는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배움의 의미』 등이 있으며, 논문에는 「」 등이 있다. 역시 배움의 문제를 교육학적으로 천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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