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7 03:40 (수)
기재부 반대에도 “재정 지원 축소 없다” 말만 되풀이
기재부 반대에도 “재정 지원 축소 없다” 말만 되풀이
  • 권형진 기자
  • 승인 2009.09.28 13: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국립대 법인화 등 ‘정답’ 정해놓고 정책 ‘밀어붙이기’ 나선 교과부

“세 가지에 중점을 두려고 한다. 첫번째는 소통, 두번째는 현장 중심, 세번째는 데이터 중심이다.”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제1차관이 지난 2월 3일, 취임 후 첫 기자간담회에서 한 말이다.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할 때 이념이나 철학 위주가 아닌 데이터 중심으로 할 것”이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교과부가 주요 대학정책을 추진하는 모양새를 보면 이러한 다짐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정답’을 미리 정해놓고 밀어붙이기에 급급하다는 비판이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서울대 법인화를 앞세운 국립대 법인화 추진이 대표적이다. 교과부는 지난 2~21일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 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교과부 입법예고안은 기존에 관리하던 국유재산의 무상양여, 고등교육예산 증가율을 반영한 국가 지원 등 서울대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다. 당장 “국립대 법인화를 가속화하기 위해 서울대 안을 대부분 수용한 것”이라는 비판이 뒤따랐다.

입법예고 후 이 차관은 국립대 법인화 홍보에 적극 나섰다. 전국국공립대총장협의회, 울산과학기술대 등 잇달아 현장을 찾아 “법인화 이후에도 정부 재정지원을 줄일 의도가 없다”고 강조했다. 국회에 제출돼 있는 국립대 재정·회계법(안)을 수정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말도 했다. 서울대 법인화법과 달리 국립대 재정·회계법(안)에는 정부 재정지원이 임의조항으로 돼 있다.

이 차관 말과 달리 기획재정부는 재정지원 의무조항에 반대하는 의견을 교과부에 전달했다. 행정안전부 역시 공무원연금 적용에 난색을 표했다. 을지로 부지 반환 문제가 걸려 있는 국방부를 비롯해 보건복지가족부, 농림수산식품부 등에서도 교과부 안에 이견을 나타냈다. 교과부 관계자는 “기재부는 어떤 법안이든 ‘재정지원 의무화는 안 된다’는 게 기본입장이다. 입법예고 전에 부처 협의를 하긴 했지만 마무리는 못했다. 앞으로 규제심사를 거쳐 법제처에 넘길 때까지 부처 협의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기재부 반대는 진작 예상했던 바다. 벌써 몇 년째 되풀이되는 풍경이다. 지난 2007년 ‘국립대 법인의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 제정을 추진할 때도 당시 교육인적자원부(현 교과부)는 ‘안정적인 재정지원’을 약속했지만 최종 정부안에서는 임의조항으로 축소됐다. 재정경제부(현 기재부) 반대를 뚫지 못했다. 공무원연금 적용도 당시 행정자치부(현 행안부) 반대로 사학연금 적용으로 바뀌었다. 지난해 국립대 재정·회계법(안)을 국회에 제출할 때도 재연됐다. 사정이 이런데도 이 차관은 국공립대총장협의회 정기총회에서 ‘노력하겠다’는 말 외에 별다른 묘안을 내놓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부 재정지원 축소에 대한 국립대 총장들의 불안감이 해소되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법인화에 총대를 멘 서울대 역시 마찬가지인 듯하다. 서울대 평의원회는 지난 21일 ‘교과부 입법예고안 자체는 지지하지만 주요사항이 훼손되면 안 된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제출했다. 박삼옥 서울대 평의원회 의장(지리학)은 “재정적인 면이나 자율성 확보와 관련해서 현재 담고 있는 내용은 최소한의 수준이기 때문에 그 이하로 훼손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박성현 서울대 법인화위원회 공동위원장(통계학)은 “서울대가 법인화하려는 목적은 자율성 확보와 재정 확충이다. 그런 쪽에서 손상을 입고 의미가 없어지면 우리도 법인화 못한다. 재정지원을 임의규정으로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조했다.

국립대 법인화는 그 자체도 논란이지만 더 큰 문제는 정책 추진 방법에 있다. 반상진 전북대 교수(교육학)의 말이다. “국립대 법인화는 참여정부도 특별법 형태로 추진했지만 사실 1994년 5·31교육개혁방안에서 시작됐다. 현 정부 임기 안에 마침표를 찍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문제는 정책의 실효성에 대한 논의 과정을 생략한 채 정부가 이것만이 ‘정답’이라고 고집하는 데에 있다.”

‘정답 찍고 밀어붙이기’는 새 정부 출범 이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교과부는 시간이 촉박하다는 지적에도 지난 11일까지 국립대 통·폐합 계획서를 받겠다고 했다가 인천대·인천전문대학 외에 신청대학이 없자 내년 2월까지 다시 받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지난 7월말 ‘국립대 구조개혁 추진계획’을 공고할 때 생략했던 공청회도 뒤늦게 다음달 중에 열기로 했다.

지방대학혁신역량강화(누리)사업, 수도권대학특성화사업 등을 하나로 합친 우수인력양성 대학 교육역량강화사업의 선정방식을 포뮬러-펀딩으로 바꿀 때에도 공청회와 같은 공개된 의견 수렴은 없었다. 변경된 재정지원 방식에 대한 설명과 사업 시안에 대한 의견 수렴이 있었을 뿐이다. 프로그램 위주가 아니라 ‘포괄 재정’ 방식이었던 세계수준의 연구중심대학(WCU)사업을 정권 교체 이후 개별과제 지원방식으로 바꿀 때에도 마찬가지다.
반상진 교수는 “실효성에 대한 검토 없이 마치 이너서클과 같은 소수 그룹에서 ‘정답’을 결정하면 이를 정책과제로 채택해 추진하다 보니 여전히 ‘소통’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면서 “가령 법인화가 정답이라고 한다면 왜 정답인지에 대해 답을 내놓아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권형진·박수선 기자 jinny@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