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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두루 알면 다 ‘통섭’이라고요?”
“두루두루 알면 다 ‘통섭’이라고요?”
  • 최성욱 기자
  • 승인 2009.08.07 14: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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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종 공동 학술심포지엄] 예술과 과학의 통섭과 창의성

‘두 문화’(과학기술 문화와 인문사회 문화)간 만남의 장을 모색해 본 릴레이 토론이 지난 5일 과학과 예술간 통섭 논의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지난달 15일부터 매주 수요일 서울대 규장각 대강당에서 열린 이번 공동 학술심포지엄은 일대 패러다임의 전환을 몰고 올 유비쿼터스 시대를 대비하는 데 ‘학문간 통섭’을 화두로 삼았다.

네 차례 진행된 토론에는 인문학(철학, 역사, 문학)과 사회과학(정치, 경영)을 비롯해 과학사, 뇌과학, 미학 등 다양한 학문분야의 교수들이 참여했다. 특히 건축가, 설치미술가, 시민사회활동가 등 대학 바깥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을 토론자로 초청, 현장의 시선을 함께 담았다. 이들은 ‘통섭’ 논의를 한층 더 활발하게 이끌었다.

5일 열린 ‘예술과 과학의 통섭과 창의성’은 심광현 한예종 교수(미학)가 주제 발표하고, 박찬경 설치미술가, 장재호 한예종 교수(컴퓨터 음악), 주일우 문지문화원 ‘사이’ 기획실장, 최진욱 추계예대 교수(서양화), 홍성욱 서울대 교수(과학사)가 패널토론자로 나섰다.

“카오스에 함몰된다(?)”

최진욱 추계예대 교수(서양화)는 화가들의 말 못할 고민을 털어놓았다. 최근 화가들은 작품 기획에서부터 전시, 운송, 판매, 창고정리 등 창작활동 외에도 할 일이 많다. 교수도 교육과 연구의 부가활동으로 행정업무 등 잔업이 적잖은 것과 비슷할지 모르지만, 최 교수는 이를 통섭과 연관 짓는다. “작품 활동 외에 다양한 업무를 총괄하다 보면 종종 혼란에 부딪힌다. 심지어 자신이 뭘 그려야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내던져진다.” 다양한 역할을 요구 받으면 “종합적 사고와 대처능력이 결여된 상태에서 구태의연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화가들도 다르지 않은 셈이다.

한예종의 과학-예술간 통섭사업 ‘U-AT(유비쿼터스 아트 앤드 테크놀로지)’에 참가했던 장재호 한예종 교수(컴퓨터 음악)의 사례도 비슷하다. “대중에게 생소한 전자 음악을 만들어 오면서 ‘난해한 음악을 해도 음악사적으로 가치가 있다면 별로 상관없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장 교수는 최근 테크노, 댄스음악, 가요 등 대중음악가들이 전자음악을 차용하고 전자음악의 ‘비주얼’까지 넘나들며 완성도 있는 뮤직비디오를 내놓는 데 큰 자극을 받았다. “장르를 넘나드는 대중음악가들은 자유롭게 음악을 하면서도 대중들이 좋아한다. 우린 너무 자기 세계에만 갇혀 지낸 것은 아닌가.”

'지식의 잡종'을 주장해 온 홍성욱 서울대 교수(과학사)는 "대학은 학생들에게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전문지식을 가르쳐야 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부터 재정립하는 게 우선"이라고 말했다. 왼쪽부터 홍성욱 교수, 심광현 한예종 교수(미학), 이동연 한예종 교수(문화연구), 최진욱 추계예대 교수(서양화)                         최성욱 기자

심광현 한예종 교수(미학)는 두 교수의 사례를 통해 자칫 통섭을 ‘내 것이 아닌 다른 분야를 두루두루 알아두면 편리한 것’쯤으로 해석하는 일부 학계의 시선에 난색을 표했다. 심 교수가 네 번의 토론 내내 학제간 연구와 통섭 연구의 차이를 강조해 온 이유다.

심 교수에 따르면 ‘학제간(inter-disciplinary)’ 연구는 이미 확립돼 있는 분과학문들 사이에서 도출되는 새로운 지식의 생산 방법이고, ‘통섭(consilience)’은 학문 분과에 얽매이지 않고 연구자들 스스로 다양한 지식을 섭렵하고 연결하는 방법론이다. 카오스에 함몰되지 않고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해도 통섭이 더 적합하다는 말이다.

이날 통섭 논의는 앞서 3차까지 진행된 학술 토론과 다르게 각계의 활동가와 전문가로 구성된 만큼 한층 더 선명한 현실을 조망했다.

박찬경 설치미술가는 “70~80년대에 주목받은 테크놀로지 아트의 경우 90년대부터 지금까지 뚜렷한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며 “과학기술의 유토피아적 접근, 즉 과학기술에 대한 비판적 사고의 결여에서 비롯된 문제”라고 지적했다.

주일우 문지문화원 ‘사이’ 기획실장은 박찬경 설치미술가의 지적을 이어받아 “미디어 아트처럼 답보상태로 머물러 있는, 과학기술을 접목해 온 예술의 문제를 해결 짓지 않고 대대적인 통섭사업을 진행할 시기인지”에 의구심을 나타냈다.

장 교수 역시 “(컴퓨터 음악과 비주얼을 접목할 때) 실제로 현장에서는 카메라를 끼우는 것부터가 문제인데 이론을 설계하는 사람들은 너무 멀리 가 있는 것 같다”며 “현실은 이런데 한국 대학의 풍토에서 내실 있는 ‘통섭교육’은 누가 맡을 것이며, 어떤 커리큘럼과 교수법을 적용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결국 논의는 ‘온고지신’의 자세를 21세기형으로 어떻게 변용할 것인지에 모아졌다. 방법은 ‘통섭’의 핵심 가치, ‘창발성’이다. 통섭교육은 학생들에게 잠재된 창발성을 이끌어내는 작업이다. 심 교수는 대학교육의 변화를 1순위로 지목했다.

“독일이나 미국 학생들은 비판적‧역사적 사고를 겸하면서 자연과학이나 예술을 전공으로 미디어 아트를 공부한다. 반면 한국 학생들은 문‧이과로 양분돼 있고 전공주의가 팽배한 분과 학문체계를 습득한다. 미디어 아트 분야에서 발전을 기대하기 힘든 게 당연하다.”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가 ‘통섭’이란 단어를 도입하기 이전부터 ‘지식의 잡종’을 주장해 온 홍성욱 서울대 교수(과학사)는 통섭교육의 토대로, 경계를 넘을 수 있는 힘과 도전정신을 주문했다. 찰스 다윈의 삶의 궤적을 추적하면서 진보와 보수라는 양극단의 평가에 천착하고 있는 홍 교수는 “자신의 연구에 몰두하고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소스’를 찾아가면서 해결하겠다는 ‘지적인 힘’과 단순 지식이 아닌 ‘지적인 태도’”를 강조했다. 통섭을 축으로 삼는 대학 교육의 목표도 새롭게 가져가자고 말했다.

“대학 4년의 전문지식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전문지식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려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부터 다시 정립해야한다.”

최성욱 기자 cheetah@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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