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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光州에서 산다는 것
[문화비평] 光州에서 산다는 것
  • 박준상 전남대 철학교육연구센터
  • 승인 2009.07.14 17: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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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광주에서 산지도 3년이 가까워 온다.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처음으로 지내보았던 것인데, 어디서든 사람이 산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다를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여기 한국에서 살면서 지역에 따라 사람이 다르다는 판단을 지나치게 강조해 왔다. 가령 경상도 사람은 이렇고, 서울 사람은 저렇고, 경상도 사람은 어떻고, 충청도 사람은 어떻다는 식으로….

   여기 전라도 지역 한 곳에서 지내다보니 하나 분명한 것은, 이 곳 사람들에 대한 수많은 평가들 또는 편견들이 모두 근거 없다는 사실이다. 한 개인의 성격에 따라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한 집단의 사람들을 싸잡아서 단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과연 있는지 의심스럽다. 나아가 인간이 문화적 존재이기 이전에 자연적 존재라면, 과연 사람이 근본적으로 다를 수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그러나 현재 한국에서 서울과 지방 사이에 차이를 가져오는 분명한 기준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과 지방의 각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다른 것이 아니라, 경제·문화·교육 등 모든 영역에서 수치들로 제시할 수 있는, 서울과 지역들 사이의 차이와 불균형이 존재한다. 예컨대 서울과 지방 사이의 집값의 불균형, 소득의 불평등, 문화 시설들의 숫자, 대학생들의 취업률의 격차…… 진정으로 서울과 지방을 차이 나게 만드는 요인은 객관적 지표로 나타낼 수 있는 그러한 불균형들 때문이지, 어떤 장소에 사는 사람들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도 지역에 따라 사람이 다르다고 믿을 수도 있고 그렇다고 서로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웃자고 그럴 수도 있지만, 만일 그러면서 지방에 사는 사람들을 폄하한다면, 이는 서울과 지방 사이의 객관적 불균형을 암암리에 은폐하는 행동일 수밖에 없다. 사실 박정희 정권 당시, 또 그 이후로 이곳 광주와 호남 지역 사람들에게 덧붙여진 수많은 편견들과 오해들은, 그들이 실제로 겪었던 객관적·사회적 차별을 정당화하는 계기로 작동했다. 즉 너희들은 원래 그러니까,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거야라는 식으로…….

   우리에게 대학의 레벨은 너무나 중요했고 지금도 그러하며, 각 지역의 발전과 퇴보를 한눈에 보여주는 좌표이다. 이곳 전남대의 경우, 6·25 전후로는 다른 지역들의 몇몇 국립대와 함께 서울대 다음에 위치했었고(당시에 호남 사람들에게 서울 유학이란, 서울대에서 공부하는 것이지, 연·고대도 큰 의미가 없었다), 8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서울의 상위권 몇 대학만 제외하고 상위에 놓여 있었지만, 현재는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뒤로 처지고 말았다. 물론 대학의 레벨이라는 것 자체가 지금도 신뢰할 만 한 기준이 못되지만, 그것이 각 지역의 전체 발전도를 대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과거보다 서울은 지나치게 비대해졌고, 그에 비래해 지방은 그만큼 퇴보한 것이다.

   한국에서 대학의 레벨이 상징적 기표 그 이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곳 전남대학교 철학과에서 수업을 진행하고 학생들을 만나보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학생들이 외국어 실력이나 수업 이해도, 보고서와 논문 그리고 학업에 대한 열정 등을 기준으로 볼 때, 수업을 함께 했던 이른바 서울의 상위권 대학의 학생들보다 눈에 띄게 나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근래 일어난 가장 중요한 운동들 중 하나는 ‘학벌 없는 사회’였다. 한국 사회의 핵심적이고 전체적인 부조리와 불평등을 정확히 지적해 온 그 운동이 현 정권 들어오면서 미약해져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든 그 운동을 전면적으로 되살려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당위이지만, 이른바 ‘선생’으로 불리는 자가 일단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라고 생각해본다. ‘인재’도 못되는 자가 ‘인재양성’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광주와 광주 근교는 매우 아름답다. 특별한 어떤 것들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자본이 타 지역에 비해 덜 유입돼서, 즉 난개발을 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 놔두어서 아름다운 것이다. 광주 북 쪽으로 광산구를 지나 장성 쪽으로만 가다 보아도 그 위안을 주는 아름다움에 탄복하게 된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사람, 윤상원이, 아니 그보다도 윤상원으로 대변되는 5·18 당시시민들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거기에 안주하기에는 이 시대가 여전히 너무나 기이한, 기묘하게 비틀어진 불구의 시대다.

박준상 전남대 철학교육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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